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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때 만주에서 독립투쟁. 0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1 2021-02-14 15:44:03
06편..      (마지막편)



마지막으로 김일성의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경력인 '동북항일연군' 에서의 무장투쟁과 김일성이 부대 를 이끌고 소련으로 이주 한 뒤 결성된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서의 활동이다.


  소년시절의 김일성은 기독교 집안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학교인 창덕소학교를 다녔고, 민족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화성의숙, 육문중학을 다녔다. 그리고 육문중학 재학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배웠다. 이후 '조선공산청년회'와 같은 공산주의 단체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점차 국민부 내의 청년 좌파들과 함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타도제국주의동맹과 같은 반 국민부 조직 및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력은 그가 본격적으로 동만주에서 공산주의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그의 행보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김일성은 당시 만주지역의 공산주의 조선인들처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만들어진 만주의 유격대에서 활동하였다. 먼저 김일성은 안도유격대에서 활동하였는데 여기서는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결국 안도유격대는 더 큰 유격대 조직인 왕청유격대로 흡수되었다. 김일성은 이 왕청유격대에서 소왕청 전투 및 동녕현성 전투와 같은 몇 개의 전투에 참가 하여 중국공산당 및 유격대 내부에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동만의 항일유격대들은 합쳐져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더욱 체계적으로 개편이 되었는데 김일성은 당시에 많은 조선인 무장 투쟁가들처럼 민생단으로 오인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황?와 요영구에서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들로 인해 김일성은 민생단이라는 오명을 씻었다. 그리고 이 회의들의 결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고 김일성은 여기서 제3단의 정치위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은 제2군은 이후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개편되었다. 이 때 김일성은 제3사 사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여기서 김일성은 제6사의 사장이 되었다. 


김일성이 제6사 사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대표적인 활동인 보천보 습격사건과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 김일성은 국내진공작전(국내이었던 보천보 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다음 바로 제2사와 제4사와 연합하여 장백현에 위치한 간삼봉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투를 승리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은 제1사 사장 정빈의 투항으로 인해 군대를 개편했다. 이때 김일성은 제2방면군 군장이 되었고 안도현(安圖縣) 대마녹구에서 마에다(전전) 중대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냈다.

  하지만 이러한 김일성의 활약에도 동북항일연군은 괴멸되어갔다. 그래서 김일성은 부하들을 데리고 소련으로 퇴각하였다. 이것은 김일성 뿐 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북항일연군의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소련은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을 정찰부대로 이용하고 싶어 했고 이를 목적으로 동북항일연군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개편시켰다. 교도려는 소련 극동적군 제88특별려단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실질적으로 소련의 지배를 받는 여단이었다. 


여기서 김일성은 대위 계급을 얻고 1대대의 대대장(을 맡았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에서 김일성은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본 논하는 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김일성은 1912년 일제강점기 때 태어난 사람으로 인생의 꽃이라 불리는 청년시절의 대부분을 항일무장투쟁을 하는데 보냈다. 그런데 이러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은 그가 광복 이후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그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은 북한이라는 사회를 구성하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김일성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같이 무장투쟁을 했던 인물들은 해방 후에 북한의 지배층이 되었다. 이를테면 소련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최용건은 1958년 북한의 수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과 같이 활동했던 최현, 안길과 같은 인물들도 북한의 지도부가 되었다. 


특히 최현의 아들인 최룡해는 북한의 지도부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의 하 중 하나였던 소년병 리을설은 인민군 원수로 자리매김했었다. 이 같이 김일성과 같이했던 상관, 전우 혹은 그들의 자녀는 광복 후에서 부터 지금까지도 북한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위 내용을 볼 때 김일성이 광복 이전에 활동했던 항일무장투쟁 활동상은 더욱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김일성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북한 사회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는 김일성의 나라 북한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북한을 통일의 파트너로 삼아야하는 우리의 국익과도 연관된다. 북한을 이해하고 제대로 알아야하는 것은 통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다.


  본 글은 김일성이 일제강점기 시절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관하여 연구한 논문형의 글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만으로는 북한과 김일성을 전부 이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 논글은 이러한 한계점을 밝히고 북한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이 김일성의 활동상에 대해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것을 말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다.


 

* 참고문헌

 

와다 하루키, 이종석 역, 김일성과 항일만주투쟁(창작과비평사, 1992)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백산서당, 1988)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선인, 2005)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사건』(역사비평사, 1990), pp. 392~401.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역사비평사, 2011),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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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현실 28권(1998), 한국사연구회, pp. 254~291.


김성호, ?민생단사건과 만주조선인 빨치산들?, 역사비평 51권(2000), 역사문제연구소, pp. 109~147.


신주백, ?과거 기억과 현재의 相存 -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사 -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7권(2001), 한국민족운동사학회, pp. 287~327.


장세윤, ?해방 전후시기 만주지역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의 동향?, 한국근현대사연구 42권(2007), 한국근현대사학회, pp. 62~96.


정형아, ?전후 중공의 동북지역 선점과 '동북항일군'의 역할?, 역사와실학 37권(2008), 역사실학회, pp. 315~340.


이덕일, ?연해주의 소련 극동적군 88여단의 결성배경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6권(1997), 한국근현대사학회, pp. 160~18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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