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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항일독립운동..!! 03편 시리즈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4 2021-02-27 13:29:16
03편.





●  김일성의 어린시절 및 환경





김일성의 할아버지 김보현은 지주 집안의 묘지기로 가난했지만 1894년생인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숭실학교에 진학하여 졸업 후 순화보통학교와 명신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는 1917년 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기독교 계통의 항일민족운동 조직인 [조선국민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일제에 검거되어 감옥에 갇혔다. 1918년 출옥한 뒤에는 [조국광복회]를 설립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 조직원들이 체포되자 중강진으로 피신하였다. 그 무렵 의원을 열어 의료사업을 벌이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만주로 옮겨 활동하다 1926년 32살에 죽었다. 김일성은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도 장차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사생결단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고 밝힌 것이다.

 

《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1871년 평안남도 대동 출신으로 1907년 창덕학교를 세우고 교장을 지냈으며 집 근처 칠골교회의 장로로 생활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창덕학교는 김일성이 만주로 떠나기 전 2년 정도 외가에 머물며 다녔다는 학교이고, 칠골교회는 그가 어릴 때 집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다녔다는 교회다. 강돈욱은 아들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을 칠골교회 장로로 이끌고, 딸 (김일성의 어머니)의 이름을 예수의 대표적 사도인 베드로를 상징하는 반석으로 지을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 》


 

김일성의 집안환경을 살펴보면 아버지 김형직은 독립운동을 벌이다 1926년 죽고, 어머니 강반석은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를 하다가 1932년 만주에서 병사했으며, 4살 아래인 동생 김철주는 1930년대 초부터 항일빨치산으로 활동하다 1935년 옌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죽었다. 그리고 6살 위인 삼촌 김형권 역시 1930년대 김일성부대의 일원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장기형을 선고 받고 서울의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죽었다. 김일성이 어떠한 배경에서 무슨 각오를 가지고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인데, 그는 당시의 심정을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 아버지도 가고 어머니도 가고 동생도 가고 삼촌마저 가니 혁명을 위해 뼈를 깎고 살을 저미던 나의 혈육들은 다 가고 없는 셈이였다. 나는 그 때 산에서 삼촌이 사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든지 나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고국의 이름 모를 언덕에 무주고혼이 되여 누워있는 삼촌의 원쑤를 갚고 기어이 나라를 찾으리라고 결심하였다. 》


 

한편, 앞에서 김일성의 아버지는 기독교가 널리 퍼지지 않았던 1911년에 기독교 계통의 숭실학교에 진학하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장로였으며 어머니는 집사였다고 소개했는데, 이렇듯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녘 당국은 해방 직후부터 기독교를 탄압하고, 1960년대엔 "지구상에서 미신과 종교가 없어진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했으며, 1980년대까지 종교를 "지배계급이 인민을 억압착취하는 도구로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아편"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면서도 1988년에는 봉수교회를 세웠고, 1989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개설했으며, 1992년에는 만경대 근처에 김일성이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다녔다는 칠골교회도 다시 지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일이 정 고달플 때면 어머니는 삼촌어머니와 함께 례배당으로 가곤하였다.... 어른들이 례배당에 갈 때면 아이들도 따라가서 례배를 보군하였다. 신자의 대렬을 늘이려고 례배당측에서는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사탕도 주고 공책도 주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보는 멋에 일요일만 되면 패를 지어 송산으로 밀려가군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호기심이 나서 동무들과 함께 가끔 송산으로 다니였다. 그러나 동심에 맞지 않는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낀 다음부터는 례배당에 잘 다니지 않았다....


사상으로 보면 아버지도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신학을 가르치던 숭실중학교 출신이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주위에는 교인들이 많았고 따라서 나도 교인들과의 접촉을 많이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성장과정에 기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는가고 묻는데 나는 종교적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상적 영향도 주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가 례배당에 갈 때에만 송산으로 다니였다. 어머니는 례배당에 다니였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어머니, 어머니는 '하느님'이 정말 있어서 례배당에 다니시나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무엇이 있어서 다니는 건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가서는 뭘 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 》


 

앞의 인용문에서 김일성이 기독교신자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아마 가장 대표적 인물이 손정도 목사일 것이다. 손정도는 정동교회 목사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기도 한 독립운동가인데, 그의 큰아들이 남쪽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뒤 1950년대에 국방부장관을 했던 손원일이다. 손정도는 김일성의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숭실학교 동기로, 김일성이 감옥에 있을 때 7개월 동안 옥바라지를 하며 석방에 큰 힘을 쏟았고 그 뒤에도 꾸준히 그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따라서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과 친아버지 같았던 손정도 목사 집안의 영향 때문에 기독교에 매우 긍정적이거나 호감을 지녔을 것 같은데, 기독교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고 회고록에서 직접 밝힌 것이다. 그가 혁명 때문에 어머니의 신앙심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어머니 역시 독실한 신자였다기보다는 집안일에서 잠시 벗어날 겸 교회에 나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정신과 주체사상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남쪽에서 많은 신도를 갖고 있는 기독교와 북쪽에서 국교나 다름없는 주체사상이 어떻게 화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연구해 볼만 하지 않을까.


 

아무튼 김일성은 독립운동을 하던 기독교 집안에서 1912년 큰아들로 태어나, 1919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장백현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1923년 외가로 옮겨 창덕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가 죽은 뒤 중국 만주 화전현에 있는 화성의숙에 입학했는데, 이 중학교는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세운 2년제 정치군사학교"였다. 그 때부터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다가 1927년 만주 길림의 육문중학으로 전학했는데, 1929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그의 정규 교육은 8학년 중퇴로 끝났다.



   이상.. 다음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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