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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알기나 하는지?/(1948~1953).. 0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164 2022-06-06 22:03:49
《 2 》편


※   1948년~ 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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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에서의 유격전

 

남한에서 조직적인 유격전 시작은 1,000여명 이상의 '여수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도주하여 산중에 있던 유격대 및 산사람들과 합류한 1948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 *여수·순천 10.19 사건 / 1948년 10월 19일 ~ 1948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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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미국 CIA에 따르면 남한 유격대의 총인원은 적게는 3,500명, 많게는 6,000명으로 추정하였는데, 대다수는 몽둥이와 죽창을 가지고 다녔으며, 일부는 일제나 미제 소총으로 무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식량 및 보급품을 마을로 부터 징발이나 기부 또는 쌀의 도둑질로 충당하였다. 미국 군사고문단의 고문관들은 이들의 전반적인 전략은 북한이 장악하고, (현 황해남도) 해주시를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좌익활동의 중심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이유로는 '풍족한 미곡'이 생산되는 도(道) 였기에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본이 심하게 착취한 곳이었기에 미군정 초기 몇년동안 공산당에서 지도하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全國農民組合總聯盟)이 빨리 조직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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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에서는 도내 유격전으로 난민이 10만명 발생되었는데, 그 중 대다수는 유격대의 원조를 막기 위하여 남한측에서 마을을 소개(疏開)하여 주민을 분산시키는 것이 원인이었다. 경상북도에서도 지역주민과 경찰 사이에 상당한 강감정이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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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들은 좌익가족에 대한 기록이 경찰서에서 보관되어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증오심이 널리 퍼져 있었고, 소부대 단위로 이동하며 공작을 했다. 그래서 극도의 잔인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뉴욕타임즈 월터 설리번(Walter sullivan / 1918~1996) 은 남한은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하여 빈농이나 중농은 극한의 생존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경작하는 토지를 소요하고 있는 사람보단 대다수가 소작인이었고, 지주는 소작생산물의 30%를 차지, 그 밖의 징수금(세금 및 기부금 등) 이 연간 수확량의 48~70%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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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 대령인 정일권(1917 ~1994)을 급파하여 3,000명 의 토벌군을 지휘하여, 홍순석(?~1949 / 여수 14연대 반란 주동자 중 한명임)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유격대 병력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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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와 경상도의 유격대는 북한이 원조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 해안쪽은 북한이 유격대에게 무기와 물자를 원조했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유격대는 거의 100% 지역에서 충원되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무기도 소련제가 아닌 일제와 미제 무기들이었다. '도덕적인 원조'외에 북한으로 부터 받는 것이 거의 없었다.

1949년 7월 미군은 철수했지만, 실제로는 떠나지 않았다.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usman / 1918~1996) 은 여수반란을 진압하였으며, 로버츠(William L. Roberts) 장군 또한 유격대를 전면적으로 사살하는 등(6,000여명 사살 주장) 등 미군 또한 간여(참견)하여 1950년 봄에 이르러 남한 빨치산을 명백하게 패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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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50년 5~6월 유격대 활동은 현저히 감소하여 15~30명 단위의 소규모 무리 활동으로 축소 되었다. 물론 완전히 무찔렀다는 낙관된 보고는 잘못된 결론이었다.

      3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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