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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8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160 2022-06-06 22:06:07
 《8》편


■  한국전쟁ㅡ 지리산 토벌 (7) / 추기토벌

1949년 4월 18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정일권 준장은 그 임무를 완수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복귀하고, 지구사령관은 제3연대남원장 함준호 대령이 인계하여 잔당의 추토에 힘쓰게 되었다. 김지회, 홍순석이 제거되었는데도 반군의 잔당은 북조선의 지원과 지도를 받아 계속하여 준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의 게릴라 토벌은 어려웠다. 게릴라는 습격, 교통, 통신선의 파괴 등 자취를 감추지 않고 도발을 계속하였다.

거기서 녹음이 낙엽 진 1949년 가을, 9월 28일에 김백일 대령이 전투사령관에 기용되고 철저하게 소토하게 되었다. 이른바 1949년의 추기토벌이었다.

이 토벌에서 공비는 거의 소탕 토벌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대오를 짜고 행동하는 게릴라는 모습을 감추었고, 4-5인조 가량의 강도로 변화하였다.

이에 1950년 1월 15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를 해체하고 2월 5일에는 호남 일대에 선포한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여순반란이 일어난 지 거의 1년 3개월 후의 일이다. 주민은 이제 밤에도 통행할 수 있게 되었고, 집회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게릴라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토벌군에게 협력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는 1950년 6월 하순, 호남과 경남 일대에 남아 있던 게릴라는 이현상을 두목으로 하는 약 200명으로 추정되었다.

총괄

국군창단(국군창단과 거의 동시에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경천동지의 쟁란에 빠지게 한 여수, 순천) 사건은 약 반 년 후에 괴수 김지회, 홍순석 들이 사살에 의하여 일단락을 고하였다. 그 여파는 그 후 수년 계속되었던 바 그것은 북조선에서의 지원과 원조에 따른 경우가 많았다.

반란의 동기에 관하여는 1954년 3월에 발간된 육군본부 군사과 편찬의 <공비토벌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좌익 음모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기 때문에 지 상사 등은 언젠가는 자기들도 숙청 대상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반란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디” (14-14쪽).


즉, 지 상사 등의 폭발설이며 단독행위설이다. 그러나 1967년 간행 <한국전쟁사> (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는, 반란의 수모자는 인사계 하사관 지창수 상사며, 김지회와 홍순석은 반란 후의 지휘관이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군내의 결기를 계획하였고, 제주도 출동의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반란은 남로당 특별공작 책임자이며 군부 적화 공작의 최고 책임자이며, 한국 전토에 걸친 폭동과 군부 반란의 지도총책임자였던 이재복의 지령에 따른 것임은 명백하다.

“이재복은 평양신학교 출신이며 1949년 1월 19일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결과론이지만 여순반란이 이재복의 전국적 반란과 폭동계획의 일환이었다고 단안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것은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순반란 후에 산발한 반란과 인민유격대 등의 침투는 시간적으로 맥락이 닿지 않고, 또한 낱낱의 반란 등도 소규모(소규모이며, 더구나 숙청을 두려워한 자포자기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   여순반란 발발……1948년 10월 19일.

여수 탈회……10월 27일.

대구 제1차 반란……11월 2일.

구례 전투>게릴라화……11월 8일.

북조선 유격대 1차 침투 (180인)……11월 14일.

대구 제2차 반란……12월 6일.

대구 제3ㅊ 반란 (도망)……1949년 1월 30일.

김지회, 홍순석 등 사살……4월 9일

개성 송악산 5.4전투……5월 4일.

, 강대대의 월북……5월 5일.

북조선 유격대 제2차 침투 (400인)……6월 1일.

 
다음에 언급하게 될 숙청에서 좌익 수괴로 숙청된 김종석, 조병건과의 관련도 미상이며, 이 기간에 좌익이 지도하는 파업도 대폭동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때문에 이재복이 전국적인 반란의 일환으로서 지창수 상사에게 봉기할 것을 지령했다 하면, 실로 서툰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수의 반란 발발에 즈음하여 민간인 수십 명이 대내에 들어와 무장하였다는 것, 여수여자중학교의 송욱 교장이 이 반란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이재복의 지령설을 뒷받침하며, 지상사 등의 단독폭발설을 부정한다. 그러나 연쇄반응적으로 발생한 다른 관련사건은 이재복 지령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여순반란의 동기는 아직 진상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묻힐지 모른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폭발은 한국전쟁에 대한 예고며 각성을 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에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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