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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방 후 개선..왜.??
Korea, Republic of 돌통 0 196 2022-06-17 00:10:24

북한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자신의 힘에 의한 해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남측의 역사적 평가와 많이 다른데, 북은 왜 그런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





개개선(凱旋). 국어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니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옴’이라고 나온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북에서는 단순한 ‘귀국’이 아니라 ‘개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대조선역사>는 해방정국을 다룬 제2편 ‘새 조국 건설, 조국해방전쟁’의 서두에서 “영웅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리시여 마침내 강도 일제를 물리치고 조국광복의 새봄을 안아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을 거느리시고 조국에 ‘개선’(강조는 인용자)하시였다”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

2006년 평양출판사가 펴낸 <김일성 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도 마찬가지다. 책의 제4장 ‘김일성 주석과 1940년대 전반기 반일민족해방투쟁’의 마지막 8번째 절 ‘최후결전 작전과 항일무장투쟁의 위대한 승리, 김일성 주석의 조국 개선’의 말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김일성 주석께서는 9월에야 배편으로 쏘련을 떠나시게 되였고 9월19일 원산항에 개선하시였으며 9월22일 오전에는 평양에 도착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 개선으로 민족사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 여기의 특징은 김일성이 돌아온 날짜와 항구까지 밝힌 점이다.


이렇듯 김일성의 귀국을 ‘개선’이라 표현한 것은 항일무장투쟁에서 이겼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북의 역사서들은 모두 항일무장투쟁의 결과를 승리로 보고 있다.

<현대조선력사> 제1편 ‘항일혁명투쟁’의 마지막 6장 제목이 ‘항일무장투쟁의 위대한 승리’이다. <김일성 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4장 8번째 절 제목 역시 ‘
최후결전 작전과 항일무장투쟁의 위대한 승리…’이다. 항일무장투쟁에서 이겼다는 관점과 견해는 <조선전사>도 같다.

<조선전사> ‘현대편’ 항일무장투쟁사의 마지막 7번째인 22권의 제4장 제목이 ‘
조국 해방을 위한 최후결전. 항일혁명전쟁의 위대한 승리’이다.

그런데 항일무장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김일성 항일유격대가 대일전에서 승리했다는 얘기다. 이 문제는 1945년 8.15해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판가름하는 심각한 논제의 하나이다.

남쪽에선 일본의 항복을 미국 중심의 연합군에게 패한 결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해방이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타력해방론’으로 귀결된다.

북의 역사학계는 180도 다르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북에선 ‘자력해방론’을 주장한다. 즉 항일무장투쟁과 여기에 호응한 국내에서의 전민항쟁 무장봉기로 일제를 물리치고 해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의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자력해방론’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핵심은 바로 ‘최후공격작전’과 ‘전민항쟁 무장봉기’이다. ☆☆☆<참조> {대일 군사작전의 이름을 <현대조선력사>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에서 최후결전작전, 최후공격작전, 조국해방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가 자력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국내로 진격하는 최후공격작전과 이에 때맞춰 국내 인민들이 무장봉기하는 전민항쟁을 준비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최후공격작전은 1945년 5월9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 본격 준비되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선 김일성 사후인 1998년 조선로동당출판사가 출간한 
그의 회고록 계승본(구술집)인 <세기와 더불어> 8권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독 전승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은 후 련합군에 망라된 조선인 지휘성원들은 한데 모여 조국해방과 관련된 작전문제를 가지고 장시간 토론하였습니다. 정식으로 소집한 회의는 아니였지만 분위기가 아주 진지하고 엄숙했습니다. 모두가 격정에 넘쳐 일제 격멸과 조국광복을 부르짖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로 쳐들어갈 기세였습니다.

논의의 초점은 자력독립과 전민항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다는 확고한 주체적 립장을 튼튼히 견지해야 한다,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하자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고 국내의 항쟁조직들을 잘 준비시켜 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작전을 벌릴 때 그에 합세해서 전인민적인 항전을 벌려야 한다,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의 군사적 련계를 강화하고 쏘련의 전반적 대일작전과의 깊은 련관 속에서 협동작전 준비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날 우리가 론의한 요점이였습니다.”(445쪽.

연합군, 소련·중국 무장력과의 군사적 연계와 협동작전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자.)

이렇게 준비된 최후공격작전은 당시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한 1945년 8월9일 김일성의 공격명령으로 시작됐다는데 하루 전인 8월8일 소련 접경지인 웅기군(현 나선시) 토리에 ☆☆☆<참조> [당시 토리는 일본군의 경흥요새구역과 웅가-나진요새구역을 끼고 있는 요지였다고 한다. “우리 전투원들은 토리의 경찰관주재소를 불사르고 마을을 해방하였습니다. 토리는 조국광복을 위한 최후결전에서 우리 혁명군부대에 의해 첫 번째로 해방된 망루이였습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57쪽) }

대한 습격전투를 벌려 해방했다고 한다.
☆☆☆<참조> {
조선인민혁명군의 토리 습격에 대해 1964년 일본에서 출간된 <조선 종전의 기록>(29쪽)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 “8월8일 오후 11시50분 조선인의 일단 약 80명이 소련군과 함께 쾌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토리에 내습하였다. 여기에 소련 영토가 지척에 바라보이는 곳이다. 우선 토리 경찰관 주재소가 습격당하였다.”(<세기와 더불어> 8권 457쪽 재인용) }


김일성의 작전계획에 따라 
☆☆☆ <참조> {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작전계획을 이렇게 알렸다. “그때 우리는 간백산 일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예정된 통로로 진출하여 각 도를 해방하며 원동의 훈련기지에 집결되여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평양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항공편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이미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들을 차지하고 전격적인 군사작전을 벌리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와 정치공작원들은 항쟁조직을 대대적으로 늘여 인민들을 전민항쟁에 불러일으킴으로써 온 민족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진격에 합세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 작전계획이 그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군사정치 정세하에서 조국의 해방을 단시일 내에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도였다고 생각합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49쪽) }


8월9일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쳐 있는 간백산 밀영에 있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두만강 연안에서 소련군과 함께 일본군의 국경 요새들을 돌파해 경원, 경흥 일대를 해방하고 웅기군 방면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국내의 넓은 지역을 해방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안 상륙부대의 선견대로 활동하던 부대들은 웅기에 상륙해 청진 일대로 진격했다고 한다.
☆☆☆ <참조> {나진 해방전투에 참가한 소련 군관 E. 우르쥬멜라슈윌리는 <조선에서의 수기>에서 “우리들이 도시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기관총의 따르륵 소리와 포사격 소리가 들려왔다. 도시 변두리로 나온 조선 농민들이 손을 휘저으면서 “만세” 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시내에서는 벌써 이틀째 김일성 빨찌산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였다.… 우리들은 도시 변두리로부터 우리를 향해 급히 달려오는 100여 명의 무장인원을 보았다. “우리들은 김일성 빨찌산 대원들입니다”라고 급히 부대 지휘관이 땅크병 대좌에게 말했다”고 알렸다.(<세기와 더불어> 8권 461쪽 재인용) }

그리고 이미 국내에 파견돼 있던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은 인민무장대들과 ☆☆☆ <참조>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무장대 활동도 소개했다. “(회령)까치봉무장대는 최후결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전투행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무장대는 쏘련군의 진출을 기다리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회령을 해방했습니다.” “량강도와 함경남도 일대의 항쟁조직들은 쏘련군이 진격해오기 전에 수많은 경찰서와 적 통치기관들을 습격 소탕하였습니다.… 신의주지구의 항쟁조직들은 총공격명령이 내린 다음날부터 경찰관 파출소와 국경 경비초소들을 들부시고 도 경찰부와 도청을 점거하였으며… 평안남도와 평양지구에서는 조국해방단을 중심으로 무어진 큰 항쟁대오가 병기창을 습격하고 도청과 부청을 점거하였으며… 황해도의 항쟁조직들도 일제가 항복하기 전에 여러 지역의 적들을 습격 제압하였습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62~463쪽) }

무장봉기조직들, 광범한 인민들을 무장봉기로 이끌었다고 한다. 
전국각지에서 일본군과 헌병, 경찰관서들을 습격 소탕하면서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한편,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8월9일부터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소련군만 일본군과 싸운 게 아니라는 얘기다. ☆☆☆ <참조> {김일성은 “최후결전의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아쉽게 생각되는 것”으로 “쏘련의 훈련기지에서 여러 해 동안이나 조국해방작전 준비를 해온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력량이 본래의 계획대로 전투작전을 전개하지 못한 것”을 꼽았다. “아군부대들이 북부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전선부대들의 작전을 지휘하는 한편 항공륙전대(공수부대)를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격할 준비를 최종적으로 끝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륙전대는 자동차를 타고 비행장에 나갔다가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번져진 것은 일본놈들이 너무 급작스레 항복한 데 있었습니다. 일본놈들이 항복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처음 얼마 동안은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63쪽) }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과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직한 인민무장대도 일 주체로서 대일전에 참여해 전과를 올리고 일제가 항복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북의 역사학계는 자력해방론을 내세운다.




또한 북에선 당시 소련군과의 관계를 ‘연합군’, 소련군의 국내 진출작전을 ‘대일 협동작전’이라고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의 관계가 상하관계나 종속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협력관계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이란 고정관념과 폄하가 여전한 남쪽과는 상극을 이루는 견해이다.

때문에 북이 당시 소련과의 관계를 대등한 협력관계로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북의 자력해방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문제는 1940년 12월 당시 소련이 하바롭스크에서 코민테른 명의로 소집한 소련 극동군과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 주보중(周保中) 등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의 회의에서 시작된다.
 
■ 《참고》로 "주보중"="저우바우중"을 뜻한다.

이때가 김일성의 첫 소련 방문이었고 코민테른 회의 참석도 처음이었다는데 회의의 주요 의제는 “만주에서의 항일유격운동의 장래 문제와 쏘련원동군사 당국과의 호상 지지와 협조의 내용과 방식 문제”였다고 한다. 소련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쇼국가들과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공동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며 
동북항일연군을 소련군 직속부대로 통합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소련의 이런 제안에 대해 김일성은 회고록(8권)에서 “그 당시 쏘련은 서부 국경쪽으로 질풍같이 육박해오는 독일과의 충돌을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독일이 서쪽에서 쳐들어올 때 일본군이 동쪽에서 쳐들어오게 된다면 그것은 야단이였습니다. 쏘련 사람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어떻게 해서나 동서협격을 피해보려고 하였습니다. 쏘련이 제출한 협동안을 보면 정세의 긴박성으로부터 오는 그들의 초조한 심리상태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114쪽)라고 분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본은 만주 항일부대들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양 선전하면서 소련 침공 구실을 만들려 했다고 한다.

동북항일연군의 중국인 간부들은 각 나라 혁명의 독자성 존중을 요구하며 소련의 제안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각자의 독자성만 인정해준다면 여러 무장력의 국제적인 련합을 반대하지 않겠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련합인가 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좀 더 연구해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절충 가능성을 열었고, 결국은 소련과 중국인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이 동의해 이듬해인 1942년 7월 독자성 인정을 전제로 한 국제연합군을 결성키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소련 극동군 독립88여단(8461보병특별여단)이 탄생하게 됐으며, 국제연합군에 대한 각종 무기와 군사장비, 피복과 식량 등의 공급은 소련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적들의 첩보 암해활동으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군 사관 등급도 실제보다 낮게 상징적인 것으로 정”했다고 한다. 또 이를 계기로 소련이 제공한 하바롭스크 등지의 남·북 두 야영을 임시기지로 사용하게 됐는데 
김일성과 조선인민혁명군은 야영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고 소부대들을 꾸려 만주와 국내로 진출해 유격투쟁을 계속했다고 한다.



국제연합군의 결성은 3자 모두에게 이점을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머지않아 대일전이 불가피한 소련에는 일본군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특수부대가 생긴 것이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게는 정규무력의 든든한 지원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특히 조선인민혁명군의 경우 
최후공격작전 때 현대전 장비를 갖출 수 있게 됐고 충분한 정치군사적 준비도 보장됐다는 것이다.

소련의 대일전 개시는 자연히 국제연합군의 대일전 개시가 되고 조선인민혁명군도 여기에 일 주체로서 참여한 게 된다. 소련의 입장에서 조선 진출은 대일전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민혁명군 입장에서 국내 진출은 소련군과의 연합작전이었더라도 자신들의 조국 해방을 위한 군사작전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대일작전을 준비하던 1945년 여름 김일성은 소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해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Алекса?ндр Василе?вский) 당시 총사령관을 만났고 또 당시 소련의 정치권 2인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Андре?й Жда?нов) 소련공산당 정치국 비서도 만났다고 한다. 즈다노프는 특히 스탈린의 위임으로 만난다고 하면서 해방 이후 몇 년이면 독립국을 건설할 수 있겠는가 등을 김일성에게 물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른바 ‘소련군 대위’와 나눌 성격의 대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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