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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의 탈북시인 장진성씨
조선닷컴 2009-07-06 03:08:48 원문보기 Korea Republic of 관리자 1546 2009-07-20 20:51:02
[최보식이 만난 사람]

"시집(詩集) 가슴에 품고 두만강 넘어… 노무현 정부에선 출판 못하게 해"
"CD 통해 남한드라마 봐 막상 와서 확인해 보니 나오는 집은 모두 회장님 집이었다"
"원산 갈마초대소에서 김정일 접견할 때 손 닦으라 알코올솜 봉투 줘"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을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원으로/ 밀가루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세간의 화제가 됐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의 작가 장진성은 언론에 얼굴이 공개된 적이 없다. '탈북 시인'으로만 되어 있다. 구체적인 이력, 북한 내 활동, 탈북 동기와 과정 등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가 몇 살쯤 됐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는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라는 시집을 또 냈다.

'사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그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 앞에 앉은 그는 예상보다 젊은 30대 후반이었다. 작고 포동포동한 체구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다가, 신분 노출의 부담을 떠올리며 "그건 안 밝힐 수 없는가" 요청하곤 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북한에서 시인이 됐는가?

"평양음악대학을 다니던 1992년 김정일을 찬양한 시 50편을 묶은 '복받은 세대의 노래'라는 시집을 올렸다.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학과에서 해마다 한명씩 문학신인을 뽑는 제도에 내가 뽑혔다. 김정일이 그 시집을 봤다. 전학생과 교직원 앞에서 감사장을 받고 시를 낭송하게 됐다. 그 시가 김정일 생일 50돌 기념으로 노동신문에 실렸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나오는 장면은 당신이 직접 본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은 것인가?

"1999년 어느 날 오후 5시쯤이다. 평양의 동대원구역 시장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공개 처형이 있는 줄 알았다. 공개처형은 주민 '교양'이 목적이라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서 많이 이뤄진다. 그런데 병든 엄마가 딸을 파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안전원(경찰)이 와서 '사람을 팔고 사느냐, 정치범 감이다'고 흥분했다. 한 군인이 차마 더 볼 수가 없는 듯 백원을 주고 딸을 데려갔다. 돈을 받더니 엄마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가버리는 줄 알았는데… 그 돈으로 빵을 사 갖고 와 우는 딸에게 건네줬다. 그때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평양은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고 가본 사람들은 말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뒷골목을 가본 적은 없을 것이다. 시내에 옷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은 연출된 것이다. 당(黨)에서 가두인민반 주부와 남자들을 동원한다. '고난의 행군'시기(1994~1999년)에는 '꽃제비'들이 아침밥을 짓는 시간이면 문을 두들겼다. 나는 일일 배급을 받았고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중국 단동의 무역지사에 전화해 과일, 장난감 등 아이 생일상을 배달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냥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한번 주면 더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때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는 음대 졸업 후 조선중앙텔레비전총국에 내보내는 시를 검열·편집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면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박사원(대학원)을 다녔다. 1998년부터는 '통일전선부 101연락소'에서 일했다. 이 때문에 탈북한 뒤 '안가(安家)'에서 6개월 동안 조사받았다.

"남한 민중작가의 명의로 '반독재, 반미, 연방제 찬양' 내용의 책을 만들어 남한에 침투시키는 작업을 내가 했다. '돌아보는 얼굴', '낮과 밤' 같은 남한에서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이라는 것들이 우리 작품이다. '통전부 26연락소'는 '구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운동권 가요를 침투시켰다. 내가 나오기 직전 '인터넷침투 연락소'로 변경됐고, 남한 주민등록증 30만개를 확보해 '댓글심리전'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대남심리전이 주 임무이지만, 가끔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대북심리전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북심리전을 말하나?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가 남한도 지켜준다는 심리전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래서 1999년 5월 22일 노동신문에 '영장(영용한 지도자)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라는 장문의 서사시를 썼다. '김경민'이라는 남한의 민중 시인 명의였다. 남한의 시인이 북한 체제를 찬양해 쓴 것처럼 말이다.

'남한에도 총이 있고 북한에도 총이 있다…/그이께서 쏘신 탄도를 따라 역사가 흘러왔고/목표가 명중되는 곳에 평화의 집이 있어라 정의의 집이 있어라….'

이 시가 노동신문에 나가니 '남한 사람이 쓴 글은 다르다'는 반응이 나왔다."

―북한에서는 시인이 '귀족작가'로 불린다고 당신이 말한 적 있다.

"소설은 많은 종이가 필요해 발간이 어렵다. 하지만 시는 노동신문에 실릴 수 있다. 선전선동 도구로써는 훨씬 낫다. 노동신문에 소개되는 시들은 김정일의 찬사나 사인을 받아서 게재된다. 그래서 '귀족시인'이라고 한다. 나는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는 시를 쓴 뒤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 돈 3000원 영수증을 받은 적 있다.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운영하는 상점에 가서 상품과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인정받았던 당신이 탈북한 이유가 뭔가?

"통일전선부에는 남한의 신문과 시사잡지들이 있다. 통전부 구호가 '현지화'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조선일보만 30년 본 사람도 있다. 그에게 물어보면 '어느 기자는 몇 년 생이고 어떤 칼럼을 썼다'고 금방 나온다. 여기에 있는 남한 잡지를 친구들에게 몰래 보여줬다. 또 사석에서 '이게 뭐냐, 한민족에서 반(半)민족은 후진국이고 반민족은 선진국이다' 하는 식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곧 체포될 것이라고 누군가 귀띔해줬다. 하지만 나는 '접견자'로 분류돼, 중범죄를 범해도 바로 잡아가지 못한다. 김정일로부터 체포 사인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달아날 시간이 있었다."

―접견자란 무슨 뜻인가?

"김정일을 접견했던 인물을 말한다. 2002년 노동신문에 '태양의 미소를 노래하노라'는 시를 실었다. 북에서는 김정일이 웃는 것을 '태양의 미소'라고 한다. 다른 시인이라면 '찬란한' 수식어를 썼겠지만, 나는 '미소 뒤로 돌아가보니/우리 수령님 고향집부터 눈물이 돌아/ 자신을 위해 웃을 줄 몰랐고/ 인민을 위해 그 웃음을 다 주었다'는 식으로 썼다. 그게 김정일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그래서 원산의 갈마초대소에 불려가 김정일을 접견하게 됐다."

―접견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접견자는 나 말고 두명이 더 있었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초대소 호위관들이 손 닦으라고 알코올솜 봉투를 줬다. 김정일과 악수를 위해서다. 김정일이 앉을 자리에는 소독 분사를 했다. 김정일은 고영희(아들 김정철과 김정운의 모친·2004년 사망)를 대동했다. 고영희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김정일은 키높이 구두를 벗고 좌석 위에 양반다리를 해 앉았다. '조선의 어머니' 노래가 울리자, 기분을 전환해주려는지 부끄러워하는 고영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크게 웃기도 했다."

―김정일을 접견한 신분인데 남한 잡지를 반출한 걸로 굳이 탈북까지 생각했나?

"접견자가 정치적 죄를 범할 때는 더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하늘이 노랬다. 자살하려고 대동강에 나갔다가, 다시 주변과 상의하니 '앉아서 죽지 말고 뛰다가 죽어라'고 했다. 그때 '왕재산경음악단(김정일의 기쁨조)'에서 일하던 친구 K도 '나도 가겠다'고 했다."

―곡절 없이 친구가 왜 따라나섰나?

"그 체제가 너무 싫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농(弄)으로 '인생에서 30대가 절정인데 우리는 지금 뭘 하나'라며 분노를 터뜨린다. 특히 당간부 자녀들 모임에서 그런 불만이 높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된 것은 남한의 라디오를 몰래 듣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김정일을 욕하면서 술 마시는 것이다. 단둘이 있으면 김정일을 욕하는 게 사교전략이다."

―고발과 감시체제가 그걸 용인하나?

"대학 다닐 때 주체철학 강의 시간에 선생이 '인민대중의 발전 형태를 말해보시오?'라고 물었다. '마르크스 인식론을 보면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는 내 답변에, '너는 주체철학도 안 봐. 승승장구한다고 되어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사회주의 동구권이 붕괴된 것도 발전으로 봐야 됩니까?'라고 비꼬아 말했다. 배급체제가 무너지면서 주민 통제 능력을 잃었다. 남한에 1만6000명의 탈북자가 있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북한 국경을 탈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나?

"국경여행증으로 함경북도 무산까지 왔다. 그날 밤 두만강을 뛰려고 강기슭을 걷다가, 경비대에 붙잡혔다. '당에서 근무하던 사람에게 어디 총부리를 들이대나. 간부사업 하러 왔다가 길이 헷갈렸는데 알아보라'고 큰소리쳤다. 웃기는 게, 평양까지 전화가 잘 안 됐던 모양이다. 다음 날 풀려난 뒤 밤까지 안 기다리고 대낮에 두만강을 죽으라고 뛰어넘어왔다. 강폭이 좁고 얼음이 얼었을 때다. 다른 경비초소에서 우릴 봤다. 하지만 강 중간을 건너면 중국 국경이라 총을 못 쏜다. 북한 지옥을 벗어나는 게 그렇게 가깝고 쉬운 줄 몰랐다."

그는 중국 국경의 한 민가에 들어가, '연길까지만 보내달라'며 7백달러를 내밀었다. 연길까지 와서 찜질방에 숨었다. 거기서 한국 신문을 보고 신문사를 통해 국정원과 연결됐다.

―탈북때 동행한 친구 K는 어떻게 됐나?

"연길에서 헤어진 그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체제 선전'을 한다고 들었다. 북한에서는 내가 살인을 하고 도망간 현상수배자로 되어있다."

장진성씨는 탈출할 당시 시작 노트 2권을 품고 왔다고 한다.

"김정일 찬양시를 쓰면서 몰래 내 양심으로 썼던 것들이다. 북한 작가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가는 것은 이런 작품들이 들통났을 때다. 고발한다고 갖고 나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에 책을 못 내게 했다. 누군가가 정권 바뀔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작년에 출판할 수 있었다."

―김정일의 후계구도가 어떻게 될지 세계적 관심사다. 김정일의 세 아들 중 누구를 본 적 있나?

"1997년 당시에 북한 시장의 쌀 가격을 정하는 일명 '큰손'이라는 북한 특권층 자녀들과 돈 많은 귀국동포들의 모임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평양 '보통강호텔'에 모여 시장상황을 보면서 쌀을 비롯한 생필품들의 수입시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인맥으로 나는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하루는 김정남이 나와 '장군님께서 내게 우리 경제를 회복해 보라는 특권을 주었다. 지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중국식 개혁개방을 도입해 보려고 한다. 광명성총회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당신들이 계열사 역할을 해다오. 이게 잘 되면 인민들에게 쌀 정도는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다'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실제로 한 달 뒤부터 평양 대동강구역에 위치한 외화백화점인 '대성백화점' 옆에 '광명성총회사' 간판을 건 건물이 지어졌다. 하지만 얼마 뒤 그 건물은 지금의 '삼천리총회사'로 변경됐다. 김정남의 개혁개방 발언이 김정일에게 보고되어 경제권을 박탈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

―한국으로 들어올 때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중국을 통해 남한 드라마 CD가 많이 들어와 있다. '이브의 모든 것' '가을동화' '모래시계'를 북한에서 봤다. 북한 주민들 중 한 번이라도 남한 드라마를 안 본 사람이 드물 것이다. 남한을 알게 된 것이 이런 드라마를 통해서다. 막상 와보니 드라마에 나오는 집은 다 회장님 집이었다."

♣ 바로잡습니다
▲지난 6일자 A29면 '최보식이 만난 사람-탈북시인 장진성씨' 제하의 기사 중 "김정일을 접견했을 때…" 구절은 '접견'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김정일을 만났을 때…"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입니다. 접견(接見)은 '손님을 맞아들여 만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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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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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은 2009-07-21 04:10:11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인터뷰에
    그의 시 제목과 내용, 북한에서의 알리바이가 모앙 공개 된듯한데
    그렇게 유명시인과 시를 알수 없는 이유는 ?
    북한에서의 영화나 연가극 같은 것은 집체작이 많아서 잘 몰라도 김정일이 좋아하는 시같은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지는 편인데 일반 대중이 모를수는 있지만 이름을 감춘다고 그가 누구인지 모를가?
    그의 시 제목만 알아도 북한정부에서 알아보자고 하면 누구인지 금방 알수 있을텐데? 걱정이다.
    아니면 가명처럼 여기 인터뷰에 게제돤 시의 제목도 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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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지 2009-07-21 22:51:34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07-21 23: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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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갸우뚱 2009-07-25 21:13:17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글이 탈북자수기글에는 김은주씨가 올린 것으로 되어 있고 글 내용도 딸을 백원에 샀던 군인이 직접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진성씨도 그 군인하고 그 시간에 한 자리에서 보고 있었나보네요?
    그럼 그 자리에 있던 두 분이 모두 탈북하신 건가요?
    군인과 장신성씨 두분다?
    누구 내용을 정확히 아시는 분 계시면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일 두 분 다 탈북하신 것이면 거 참 신기하다고밖에 볼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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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ko윌 2009-07-27 13:18:32

    - jko윌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07-28 13: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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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h보다못해 2009-07-28 13:54:27
    내딸 아직도 다 못팔았나? 이젠 내딸 좀 고만 파소. 시인이라문 시다운 시를 써야지 정치바람잡이가 돼서야 쓰겄소? 묵고 살자고 한 노릇이라문 쪼꼼 이핸됀다만 이잔 고만 좀 파소. 내딸을... 그리고 내도 당신 쫌 아는디 김정일이 만났다고 하는 구라는 좀 고만 치소. 당신같은 사람 만나줄 뗑일이도 아니지만 꼭 내딸 파는데 뗑일이 만났다고 해야 매상 오르겠노? 지발 이잔 좀 사람답게 사소. 칼 물고 뜀뛰기 허지 말고... 알거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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