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인정받을 때까지 뛰리라! - 정영
동지회 13 16639 2006-11-10 13:29:17
2006년 제1차 정착사례 수기공모 우수상(2등) 수상작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인정 받을 때까지 항상 뛰리라
이 사회에 정착하는 탈북자들은 한번쯤 하나원을 나설 때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곤 한다. 안정된 직장은 가졌는가, 통장에 돈을 얼마나 쌓였는가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보통 이 두 가지 지수가 자신이 사회적응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여주는 징표로 간주된다.

누구나 정착과정에 겪었던 좌충우돌의 스토리가 있다. 하긴 수십 년 낙후된 사회를 탈출해 인류문명에로 직행한 사람들에게 곡절이 없었다면 그 자체가 비정상이다. 이 사회를 이해하고 할 바를 결심하기까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 맛본 여러 가지 실패의 좌절과 성공의 기쁨이 내일을 설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사회적응은 시간과 정비례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노력하다 보면 성장한 자신의 모습에서 자기도 모르게 놀란다. 하지만 아직도 이사회를 바라보는 탈북자들의 눈엔 당금의 상황이 새롭고 낯설고 넘어야 할 언덕이 높기만 하다.

남한 적응, 끝이 안 보인다

2003년 11월 하나원을 나설 때 나의 포부도 컸다. 중국에 숨어 4년, 몽골의 고비사막을 횡단해 목숨을 담보로 한 탈출에서 성공한 자신감 때문인지 새로운 사회가 두렵지 않았었다. 내 자신을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자신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이상적인 정착의 첫 걸음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딛던 날, 중국에서 방황하던 나를 인도해준 친구와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서두를 뗐다. “한국에서 뭘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넌지시 묻는 내 물음에 친구는 “내가 지금 뭘 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시간을 두고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심하는 것도 늦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친구는 회사에 취직하자면 운전면허증과 컴퓨터사용은 필수적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먼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컴퓨터를 배우기로 작심했다. ‘독수리타법’으로 1분에 겨우 100자나 두드리고, 메일이나 주고받는 수준의 전산능력을 가지고는 어디가 일하겠다고 말도 못 비친다.

나는 타자수를 500타까지만 늘이면 회사취직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6개월 동안 대우 IT직업전문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결과 2004년 6월 정보통신 기능사1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차례로 상계직업전문학교 전기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낮에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상계직업학교에서 전기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운전면허증과 컴퓨터 자격증이 남한 일반인들의 보편화 된 지참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사회에 나온 지 1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직업학교를 다니는 와중에도 돈 버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물탱크 청소도 해보았고, 건설장에서 시멘트 몰탈 나르는 일도 해보았다. 아파트 옥상의 먼지 가득한 물탱크 위를 벌벌 기어 거꾸로 들어가 물을 퍼내고 닦고 쓸고, 하루에 이러한 물탱크를 20~30개씩 닦아내야 겨우 5만원이다. 이 과정에 나는 한국에서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1년이 지났다. 운전면허증과 컴퓨터자격증,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나는 기업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인, 교회, 고용안전센터를 찾아 “열심히 하겠으니, 제발 받아주십사” 하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두툼하게 준비해가지고 뛰어다녔다.

이 기간에 이력서를 넣은 회사만도 100개가 넘었고 잡이스, 잡코리아, 스카우트 등에 올린 이력서를 열람한 기업이 없는지를 하루에도 여러 번 체크했다.

그러나 북한대학 경력은 인정자체가 되지 않았고, 남한 대학경력이 없다고 여지없이 퇴짜를 맞았다. 그러던 중 요행, 교회의 도움으로 어느 한 중소규모 건설회사에 취직하는데 성공했다.

회사는 대규모 건설회사들이 신축하는 아파트공사의 발코니와 정문 앞부분에 건축장식을 전문으로 맡아 하는 일종의 인테리어 회사였다. 운전기사로 취직한 나는 아침 8시부터 밤 8~9시까지 열심히 일했다. 서울 본사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광주, 강원도 춘천, 경기도 평택 등지를 팽이처럼 돌았다.

낯선 남한의 고속도로상황과 서울지형을 그때 다 익혔다고 말할 수 있다. 차가 밀려 건설자재를 제시간에 조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건설자재를 운반하다 보니, 자동차는 항상 과적운행을 했다. 여러 번 추돌사고를 일으켜 도로에서 타 운전자와 시비를 가르느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의지를 안고 열심히 달려왔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대로 살아야지”

언젠가 나는 북한에서 취득한 자격증 인정과 관련해 통일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입국 당시 조사기관의 자료와 통일부의 자료에는 내가 대학졸업자로 인정되었으나, 실지 기업들에 인력을 배급하는 담당자인 산업인력공단은 도리질한다. 인정받으려면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인력공단의 요구였다.

통일부 담당자와의 이러저러한 대화중 화제는 자연히 탈북자 사회적응문제로 이어졌다. “정부보조금에 의지해 하루하루 사는 새터민들이 대다수다. 그들이 이 경쟁사회에 어떻게 살아갈 지 걱정된다”는 내용이다.

현실적으로 얼마 전 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새터민 취업성공률은 올 6월말 전체 입국자 8천여 명의 4% 수준에 해당되는 310명으로 집계됐다. 또 일반 국민의 실업률에 비해 4배가 넘고, 월 근로소득이 100만원 미만인 사람들이 65.4%에 달한다는 반갑지 않은 기록이 나왔다.

물론 정부차원의 북한이탈주민 정착프로그램에도 일련의 부족함이 없지 않아 있지만, 본인 노력의 부족함을 결코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에서 언제까지나 정부에 자신의 삶을 기탁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안이한 생활은 내 자신이라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원을 졸업한 동기 친구들과 만나 생일파티를 열고, 술 마시고 노래방까지 갔다가 새벽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직업학교는 오후 타임을 끊어놓았으니, 아침 10시에 일어나도 상학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반년쯤 지속된 이러한 생활패턴은 공허함을 낳기 시작했고,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남한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도저히 발 디딜 자리가 없다는 의식이 점차 싹트기 시작한 것은 아마 어느 한국인 부장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강남에서 잘 나가는 중견기업 부장이었다. 그는 자기 집도 있고, 고급승용차에 월급도 많이 받는 중산층이었다. 잘 나가는 그도 하루 일을 마치고 밤 10시까지 외국어 학원에 다녔다. 처음에는 “외도하지 않냐”는 아내의 의부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남편의 의도를 안 다음 아내도 그가 공부하는 저녁시간을 이용해 미용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강남에 집도 있고 봉급도 두둑한 사람이 뭐가 모자라 더 배우냐는 물음에 그는 자기는 항상 뭔가 부족한 자아의식에 쫓긴다고 한다. 무한경쟁사회에서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낙오자가 되고,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밀린다는 방어의식이 생긴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제공의 임대아파트에, 몇 푼 안 되는 정착금에 연연하면서 과거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안주하고 있다. 그 한국인 부장의 사고와 대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부의 탐욕을 떠나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무한경쟁시대인 남한에서 남한사람들과 당당히 경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잠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언제 남보다 앞서랴’ 이것이 이 사회를 주도하는 리더들의 사고이다.

나를 도전적인 삶으로 부추기는 또 다른 기회가 있었는데, 열심히 사는 한국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새벽 4시경 잠을 자다 ‘이상한 꿈’ 때문에 더 자지 못하고 밖에 나왔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별안간 열리더니 웬 사람이 뛰쳐나와 신문을 뿌리고 잽싸게 다시 오르는 것이다. 불과 10초 사이에 한 층의 신문배달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향한다. 투잡(two job)을 하며 열심히 사는 동네 신문배달부들이다.

“이 땅에 태 묻은 사람들도 저렇게 뛰는데, 우린 도대체 뭔데?”

“난 아직 배가 고프다.”

건설회사에 다닌 지 6개월 만에 나는 사직서를 내고 모 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다. 중학시절부터 글쓰기에 취미가 있어 작문과 기행, 수기와 같은 글을 투고해 북한 매체에 여러 번 게재되긴 했지만, 프로는 아니었다.

북한과 중국에서 겪었던 참담했던 삶을 적은 수기를 차마 버릴 수 없어 제 3국으로 탈출할 때까지 봇짐 속에 꾸려가지고 다니던 때부터 나는 민주주의 언론에 이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북한에서 언론이라고 하는 노동신문이나, 중앙TV는 언론이라기보다 주민들을 노동당의 의도대로 동원시키기 위한 선전매체에 가깝다. 노동당의 매개체로 전락해 구호체가 많고 딱딱하고 선동적이다. 이와 달리 자유민주주의 언론은 진실을 밝혀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의 발달은 사람들을 열린 인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요즘은 거짓과 위선이 통하지 않는다. 진실을 바라는 독자에게 정신적 양식을 배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워낙 외래어가 많아 하나원에서 배포되는 신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본 기억이 없는 나의 신문사 적응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떤 것들은 영어와 외래어로 되어있어 글자가 눈에 보이기는 하나, 이해하기가 곱절 어려웠다.

신문사 적응을 위해 우선 신문 보는 법부터 연습했다.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선배들에게 묻고, 묻기 쑥스러우면 네이버 지식검색창에 묻곤 했다.

정보화시대의 급격한 발전에 힘입어 요즘 기사쓰기는 펜 대신 자판을 두드린다. 종이신문이 아닌 웹은 지면절감에 대한 부담은 없다. 그러나 신속한 기사생산을 위해 고뇌를 할애해야 하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따른다. 당일 생산기사제목을 안고 온밤 씨름을 벌여야 할 적도 있다.

이따금씩 내 기사를 보고 감사를 표해오는 대학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이 많다. 내가 몰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

낮에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밤 10시까지 종로 소재 고려중국센터에서 공부한다. A4용지 3장 분량의 기사 2건을 써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밤에는 밤대로 90분 강의를 듣자니, 피곤해 아침에 일어나기도 지긋지긋하다.

그래도 아침 일찍 기상해 일간신문 기사를 훓어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됐다. 지하철에서 하루 다룰 기사를 정리하고, 머릿속에 기사를 타이핑해야 한다.

이렇게 시간을 쪼개다 보면 저녁 수업준비가 미미하다. 그래도 중국TV 청취와 중국 신문은 어려움 없이 보던 터라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올해 5월에는 중국어 능력평가시험 HSK 9급에 합격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자기가 돋보여 뿌듯해질 때가 있고, 또 생활의 한 측면이 소멸된다는 소외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 우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데 긍지감이 있고, 남한사람들과 당당한 경쟁자가 된다고 생각될 때 기쁘다. 비록 지금은 박봉에 시달리며 생활이 어려워도 자기 능력을 키워가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힘든 줄 모른다.

소외감은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줄고, 술 마실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젠 친구들 얼굴 본지도 꽤 오래돼, 간혹 ‘짠돌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다 혹, 이 글을 보고 알만한 친구들은 “전화 줘, 그럼 내가 한방 쏠게” 하고 자기 위안에 그칠 뿐이다.

올해는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생에게는 정부지원 등록금이 보장되지 않는다. 직장을 다니며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 못한 바도 아니다.

하지만 통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비록 오늘이 어려워도 가다 보면 지금의 고생이 소중한 경험이 되고 인생의 족적이 된다고 생각하며 출근길에 오르곤 한다.

2006년 10월 정영(2002년 입국, 현 연세대 대학원생)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좋아하는 회원 : 13
고담녹월 Greece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조광호 2006-11-12 20:38:12
    당신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인생을 어덯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치게 하는 글이였습니다 같은 이북사람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언제나 지금처럼 성공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이미연 2006-11-29 16:12:31
    님의 글을 너무 실감나게 잘 보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쓰고 싶었던 글이였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꾸미지 않은 님의 그 솔직함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올해 하나원을 졸업한 한살짜리 어린애와 같은 우둔함에 아직도 직업하나 찾지 못하고 있는 숙맹이니깐요
    한국땅에 들어서면 그동안 하지 못한 공부에 누려보지 못한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리라 생각했던 그건 다 물거품에 지나지 않고 언제나 나만 자부해왔던 그건 다 허울 뿐이라 참 할 이야기도 할 일도 없습니다.
    님의 솔직하고 대담함에 머리가 숙어집니다.
    앞으로 도 분발하셔서 꼭 성공하십시오
    언제나 동료들의 힘 받을 수 있는 동력이 되여주십시요
    님의 자그마한 꿈일지라도 성공하시기를 두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파랑이 2006-12-07 18:44:23
    님의 글 잘 보고갑니다.
    님의 글을 보고 나니 북한에서 늘 외우며 살던
    <가는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는군요...
    님의 성실하고 근면함에 꼭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지은이 2006-12-23 00:03:59
    잘 보았습니다.
    갑자기 머리가 핑~도는 느낌 ,정신차려야 되겠다고 자책합니다..
    앞으로 더좋은 글, 더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시간 나는대로 들리겠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다시한번 2006-12-29 22:54:18
    좋은글을 잘 보았습니다.
    다시한번 저를 돌이켜 보게 하는군요.
    더욱분발하고 시간을 아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군요.
    앞으로 좋은글 많이 올려 주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지나가다. 2007-01-28 05:49:47
    요즘들어 헤이해진 제 정신상태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안영현 2007-02-24 22:01:19
    남한의 젊은이들이 북한의 현실을 직시 했으면 합니다.
    북한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늘 기도를 하겠습니다.
    힘내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남쪽남자 2007-03-13 18:30:35
    글 감사하고 화이팅 아자아자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2000만분의 1 - 최금희
다음글
&quot;장미의 전쟁&quot;을 이겨낸 통일부부 - 김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