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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추방지에서 - 옥별이
동지회 28 8402 2004-11-08 05:56:22
저는 태여나서 17년동안 평양에서 살았어요. 그러다 어머니의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가족혁명화"라는 간판아래 함북도 김책으로 추방령을 받았죠. 지방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저로서는 너무도 기뻤어요. 지방에 내려가면 초가집에 앞에는 내물이 흐르고 뒤산에는 과일나무를 심어서 사과나 딸기나...등을 따먹고... 동화책에서 본 "무릉도원"같은 낙원을 꿈꾸었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였죠.

드디여 "정배살이"가는 날!!!
평양역에 기차표를 끊으려고 나갔는데 표가 없다고 다음날에 가라더군요. 당중앙에서는 그날 당장 떠나라 하고, 기차역에서는 표가 없다고 다음날에 떠나라 하고...아무리 당중앙이 세다지만 표가 없는데 어찌 떠날수 있겠습니까?

어쩔수 없이 하루밤 평양에 더 머물러 있었죠. 왜 이런 말 있죠... "정배살이도 가려다 못가면 섭섭하다" 저희가족 상황엔 맞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섭섭하더라구요. Vm~ 다음날 기차에 올랐답니다. 기차가 출발하는 첫역인데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속에서도 옥별이네 가족은 자리를 잡고 앉았답니다.

추방지 까지 정시로 12시간 정도...
그런데 12시간은 커녕 이틀동안 갔답니다. 한마디로 엉치에 구멍이 날 정도였죠. 사람이 너무 많아(많은 정도가 아님, 상상도 안됨) 화장실도 못가고. 기차가 역에 정차할때마다 창문을 통해서 해결하군 했죠. 정말로 태여나서 처음 목격한 상황들이였답니다.

새벽 2시 추방지에 도착.
기차에서 내려 역으로 나가는데 참으로 듣기 이상한 목소리들이 들려왔어요. 강한 옥타브, 알수 없는 사투리들... 그야말로 함북도 사투리들이였어요. 참, 기차에서 내렸는데 불빛이 한두점만 보일뿐 캄캄하고 음침한 역이였어요. 평양의 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곳이였어요.

드디여 추방지에 도착!
아빠네 직장에서 김책시에 집이 있는 사람을 같이 보내주어서 그아저씨네 집에서 숙식을 할수 있었죠.

다음날,,,영원히 살지도 모르는 추방지를 구경해야 할것이 아닙니까..그래서 옥별이 가족 김책시 시장(장마당)부터 찾아갔죠. 왜냐? 장마당은 그 지방 주민들의 생활 현황을 한눈에 볼수 있는 좋은 곳이기 때문이죠. 시장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못볼 광경들을 보았답니다. 거리에 다 해진 옷을 입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헝겊처럼 엉키고 손은 때가 너무 껴서 쌔까만 어린 아이들, 노인들이 쓰러져 있었답니다.

옛날부터 조선사람들 인심좋기로 소문났죠. 이런 말도 있죠. "동방예의지국" 이런 조선사람들의 후손들이 그 광경을 못본척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때 옥별이네 가족 깜짝 놀랐답니다. 옥별이네, 그사람들을 도와주려 하자 옆에 같이 가던 아저씨 그냥 가자고. 주기만 하면 주위에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거라고 하더군요. 정말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죠. 하긴 예로부터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죠.

김책시는 1992년도부터 식량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장마당에 도착, 들어가서 돌아보니 그야말로 도깨비시장이더군요. 여기 남한과는 대비도 안되지만요...쓰던 그릇가지, 이불, 숟가락, ...정말 없는게 없었어요. 하지만 그 물건들의 상태는 정말 안좋았죠..(^.*) 장마당에는 없는게 없었답니다. 너무 맛있게 생긴 빵이 있길래 5원을 내고 하나 샀죠.

한입을 떼어먹고 그 맛을 음미해보는 순간...누군가가 내손에서 빵을 획~ 나꿔채더군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꽤죄죄한 아이가 힐끔힐끔 돌아다보며 냅다 달리더군요. 놀라웠습니다. 그 속도가...주변에서 물건팔던 아줌마들 히죽히죽 웃으시더군요.(지방에 가면 평양사람 금방 티가 남.)
..........

김책에 추방되니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답니다. 뭐냐구요? 김책이 바다가지역이라 물고기가 너무도 많았다 이거죠. 평양촌놈 처음 보는 물고기들, 뭐 이름이 망챙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게"도 어찌나 큰 "게"들인지, 털도 많이 달리고...평양에서는 생물시간에 그림으로만 보던 물고기들이 김책시에는 산채로 널려있었죠.(ps: 시장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직장들에 생산이 다 멎다나니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장사를 하고 있었죠.)

이렇게 김책시 첫 나들이는 옥별이네 가족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막막감을 안겨주었답니다. 추방된지 20일만인가,... 김책시에서는 옥별이네 가족이 "항일투사가족"이라고 아파트를 주었답니다. 이 아파트의 역사를 말하자면 김일성이 김책시 방문시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중턱에 2,000세대 아파트를 지어 어로공들이 집에서도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쉬도록 하라는 말을 듣고 지운 아파트죠. 집은 방 2칸, 화장실, 부엌, 조그마한 전실로 되어있었답니다. 집이 다 좋은데 한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죠.

평양에서는 밥 지울때 석유콘로로 하는데 김책에서는 나무로 직접 불을 때서 해먹어야 하거든요. 불을 피울줄 모르기때문에 웃집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죠. 할머니, 손에 송치(소나무 송진.. 뭐라든지, 잘 모르겠음)를 들고 내려오시더니 거기에 불을 붙이고 나무에 불을 지피더군요. 마술사 같았죠.

옥별이네 가족, 할머니 옆에 앉아 연신 "와~"하는 감탄사들을 뿜어냈죠. 남의 도움을 받는것도 한두번, 이제는 우리가 직접 불을 때야 했습니다. 엄마 혼자 부엌바닥에 앉아 한 30분 동안 시글벅적 하더니 "붙었다!"하고 소리를 치는 것이였어요. 옥별이 달려 나가보니 엄마의 얼굴은 말이 아니였습니다.

앞의 머리카락은 불에 그슬러서 다 타들어가고 얼굴에는 새가맣게 먹칠하고, 눈엔 연기를 너무 쐐여 시커먼 눈물들이 줄줄 흐르고 있었죠. 김책시에서 1년 반을 살았는데 그 기간 불을 때면서 이런 상황들은 계속 되풀이 되었답니다. 이렇게 벌써 2달이 지나갔답니다.

1996년 2월,,,
김책시에 있는 김책고등중학교(원래는 96년 4월에 졸업해야 하는데 김책시에 추방되자마자 졸업하면 힘들것 같아서 한해 묵었음.96년도부터는 4월에 새학기를 시작하였음.)에 편입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배치해주는대로 옥별이가 공부하게 될 학급교실로 들어갔답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시한번 옥별이는 깜짝 놀랐어요.

왜냐구요...? 글쎄 교실안에는 다 찌그러져가는, 그야말로 평행사변형 책상들에(쥐도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책상을 엄청 갉아먹었더군요) 살이 다 빠져서 씨글떡씨글떡거리는 의자들... 가운데는 고철더미(겨울용 난로)가 솟아있었죠. 평양의 교실과는 너무도 딴판이었어요. 여기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땅이 맞는가 의심이 갈 정도였죠. 이런 교실 맨앞책상에 조그마한 아이들이 앉아있었어요.

옥별이는 속으로 "선생님 자식인가보다"하구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학급 아이들이었어요. 영양상태가 부족해서 키도 자라지 못하고, 까무잡잡한고, 교복은 언제 선물받았는지도 모를 정도로(교복은 김일성 생일이나 기분좋은날??에 즈음하여 학생들에게 일명 선물이라는 간판아래 나누어줌), 그야말로 절약형의 옷(바지가랭이가 발목우에 걸려있음, 여학생들의 치마는 조금만 숙이면 다 들여다보이는 정도임)들을 입고 있었고 여학생들 양말(스타킹)은 깁고 또 기워서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형편이었고, 신발 또한 발가락이 땅을 핡고 다니는 정도였죠.
만일 평양의 학생들이 이런 상태로 다닌다면 아마도 당중앙에서 난리가 났을겁니다.

인민을 위하여 잠도 안자고 애쓰고 있다는 김정일이 이 광경을 보고도 감히 그런 소리들을 줴칠수 있을지 의심이 갑니다.
.....................

또한 학생들의 학습장(notebook)의 상태를 말하라면 그거 또한 가관(可觀)이었죠. 종이를 나무로 만든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키듯이 나무쪼막들이 종이 도처에 널려있고, 종이 만들때 감탕밭에 담궈났다가 꺼낸 것처럼 종이 색갈 또한 장난이 아니였죠. 아마 한국에선 보고 죽재도 찾아보기 힘들겁니다. 그런 학습장도 없어서 12과목정도 되는 학과들을 그 한책에 다 베낀답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북한의 독재자는 김일성, 김정일의 혁명활동인지 개지랄인지 하는 과목은 고급 학습장(종이가 하얗고 좋은 책)을 쓰도록 하고 있죠. 만일 나쁜 학습장에 썼다가는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등 구실같지 않는 구실들을 만들어내며 비판투쟁을 벌리죠.

어쨌거나...
추방지에서의 학교생활은 옥별이에게 큰 충격이였죠.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됬어요. 선생님들, 학생들 대부분이 식량공작(먹을 것을 구하러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것)을 나갔기 때문에 매 반에는 절반가량의 학생들과 몇명의 선생님들이 남아있었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학교당국은 2개반씩 합반을 하고 여러 시간에 걸쳐서 배워야 할 분량들을 한 시간에 해제끼군 했죠. 오후에는 모내기철이라 학생들을 집합시켜 놓고 인접 농장들에 농사 지우러 나간답니다.

버스가 없어서 1~2시간 가량 걸어서 농장까지 가죠. 그래도 학교 당국, 양심은 있는지 노래 부르면서 행진하란 말은 안하더라구요...(왜냐구요? 하루 세끼는 커녕 한끼도 못먹는 학생들이 다반수니까요...) 농사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사람이 그날 해야 할 량이 있죠. 그것을 다 해야만 집으로 돌아온답니다. 모내기를 다 끝내면 그다음엔 "충성의 외화벌이"(김정일에게 외화를 벌어 바치는 사업)한답시고 학생들을 끌고 산으로 올라가죠. 산에 가서 "솔화분"을 채취해야 한답니다. 온 산을 다 흩어서 건지는 "솔화분"(남한에선 솔분이라 하는가? 잘 모르겠음)은 한줌도 안된답니다. 산을 다 흩고 발이 닳도록 싸다녀도 한 줌밖에 못하는데 이러한 것을 1kg씩 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싸다녀야 하는지 여러분 짐작해 보십시오.(그놈의 솔화분 정말 무게가 안나가더군요.)

또한 산을 하루종일 싸다니자면 점심을 먹어야겠져? 점심시간 학생들 도시락 보면 정말 우리 북조선 인민들의 창발성들이 돋보입니다. 아마 옛날에도 이런 광경은 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병에다가 죽물을 담아온 人, 소나무 껍질로 떡을 빚어 온 人,(일명 송기떡) , 그나마도 없어서 빈손으로 온 人, 정말 각양각색들이죠.

이러한 "충성의 외화벌이"작업이 끝나면 또 새로운 사업이 우리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죠.
뭔고 하니 벌거숭이 산에 올라가 돌로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하자는 문구를 새기는 작업이죠. 그거 장난 아닙니다. 안해본 사람은 모르죠. 이밖에도 종류는 다양하게 많습니다. 더 언급은 않겠습니다.

평양에 있을 때는 듣지도 보지도 해보지도 못했던 일들을 김책에서 뼈빠지게 했습니다. 같은 독재자 밑에 있지만 평양의 아이들은 지방 아이들에 비하면 호강합니다. 그야말로 친자식과 이붓 자식의 차이죠. 먹지 못해 굶은 학생들을 가만히 놔두어야 할 것을 이놈의 독재자는 잠시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식량공작을 나갔다고 해서 그 학생들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는 매일마다 학생을 보내 언제 오는가, 오는 즉시 학교에 보내라, 등등 또 그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면 자유주의분자라느니, 어쨌다느니 어린 학생들에게 온갖 감투를 씌어 꼬마반동으로 몰고 있죠. 이 외에도 독재자가 학생들에게 가하는 만행들을 제가 모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일일히 말하자면 정말 피 터집니다. 왜냐? 내가 직접 겪었고 지금도 북한의 어린이들이 이러한 고통들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옥별이는 평양에서는 해볼 수 없었던 갖가지 일들을 다 해보았답니다. 독재자에게 충성하면서 북한의 학생들은 태여나서 부터 궂은 일들을 하면서 살죠.(이들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네처럼 산다고 믿고 있죠.)
옥별이, 원래 자유주의 끼가 조금 있었죠.

평양에서도 토요일만 되면 학교에 결석을 했답니다. 왜냐구요? 토요일에는 수업을 2시간 만 하는데 수업이 끝나면 주간 생활총화(한주간 김일성, 김정일의 가르치심대로 생활했는가 하는 것을 총화하는 것), 김일성, 김정일 따라배우기 학습, 빨찌산 회상기 김부자 찬송노래, 시... 등등 강제학습을 시킨답니다. 이 외에도 태권도, 국방체육, 율동체조,사열행진(군대들처럼 다리를 45도 각도로 들면서 팔을 저으며 행진하는 것), 등 갖가지 육체적인 것들도 시킨답니다.

북한의 독재자는 이렇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들만의 노예로 학생들을 강제교육을 시키죠. 옥별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하기 싫어서 토요일만 되면 아프다는 핑계로 결석했죠. 그런데 독재자의 마름인 우리 훈당(선생님을 이렇게 불렀음)은 학급 학생들을 줄세워 혁명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옥별이 집앞에서 행진을 하며 나올때 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끝까지 집구석에 숨어있었죠. 나중엔 지쳤는지 그냥 가버리더군요. 월요일 학교에 나가면 엄청 욕을 먹습니다. ( 하긴 그걸 다 감수하고 하는거죠. 자유가 쉽게 얻어지나?) 성적표에 보면 옥별이 조직생활이 낙후하다고 적혀있죠.(통일되면 보세요.) 이렇게 자유주의끼가 조금 있었답니다. 더구나 김책의 학교에서는 수업도 잘 안가르쳐주고..등등 조건이 안좋아서 처음 몇달만 나가고 그담부터는 아예 나가지 않았답니다. 집에서 그냥 놀고 있었죠.

김책에 추방된지 1년이 지나갔죠. 처음에 추방될때 가지고 온 돈들을 다 써버리고 말았답니다.. 이제는 옥별이네도 죽을 먹으며 사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죽도 그냥 죽이 아니죠. 강냉이가루 20%에 산나물 80%정도, 물, 소금을 넣고 그냥 끓이죠. 하두 먹을것이 없으니까 그것도 맛이 좋더라구요.(지금도 맛이 있을라나 Vm~) 이건 그래도 괜찮은 음식이랍니다.

연재 5에서 언급했듯이 소나무껍질로 만든 송기떡을 먹으면 장난이 아니죠. 이걸 먹으면 배설이 안된답니다. 이밖에도 음식종류는 정말 다양하죠. 돈이 없어 가지고 있던 가구들도 팔아먹고, 협잡당하고(사기당함) 정말 사는게 사는 것같지 않았죠. 하루는 엄마가 평양에 갔다오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평양에 가려면 통행증(여행증명서)가 있어야 들어간답니다.(뭐 간첩의 평양침입을 방지한다나 뭐라나... 간첩 좋아하네~) 통행증이고 뭐고 옥별이네 한시가 급했답니다. 그래서 그날 밤 떠나기로 결심했죠.

역전에 나가니 역구내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식량공작, 장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이었죠. 옥별이네도 그 속에 끼워 평양행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렸답니다. 한 7시간 정도 기다려서야 평양행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원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옥별이네 가족 인파속에 묻혀 악을 쓰며 역에 들어갔습니다.(열차타러 들어가는 그 과정 정말 글로 표현하기 어렵답니다. 써도 여러분들은 이해를 못하실겁니다.) 드디여 열차 도착. 기차는 이미 사람으로 꽉 차고 열차 지붕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앉아있더군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죠. 그러나 옥별이와 엄마는 꼭 이 열차를 타야만 했답니다.

이때 엄마가 옥별이를 찾으며 여기 올라타 앉으라고 하더군요. 엄마가 가르키는 곳은 바로 사람들이 열차에 오르는 발판(계단)이었죠.(허리를 숙이면 엉치만 들어갈수 있음) 옥별이와 엄마는 그곳에 엉치를 들이밀고 손잡이를 꼭 잡고 앉았답니다. 엉치만 안전한 곳에 놓였을 뿐 나머지 부분들은 그냥 허공에 들리운 셈이였죠. 머리와 땅 사이의 거리가 50cm 였죠. 드디여 열차가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속도가 엄청 나더군요. 숙인 머리아래로 땅이 쑤욱~ 지나가고 굴간을 지날 때마다 밀려오는 공포들을 떨쳐버릴수가 없었죠. 까딱 잘못하면 그냥 떨어져서 죽는 것입니다.(옥별이 키가 그리 크지 않답니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죠. 왜냐? 한국 여자들처럼 키가 엄청 컸더라면 굴칸을 지날 때 머리가 쑥 잘렸을 지도 모르니까요...) 불안전한 자세로 1~2시간동안 가니 마지막에는 몸에 쥐가 일더군요. 엄마는 옥별이에게 손을 절대 놓으면 안된다, 밑에 보지 말고 눈을 감고 있어라, 하면서 나에게 조그마한 힘들을 실어주었죠. (오늘날 엄마가 그날을 돌이켜보며 옥별이에게 말하길 "내가 못나서 딸자식을 죽이는구나!"하고 속으로 엄청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죠.

이때 우에서 어떤 남자가 소리치더군요. "여기 계단에 여자 둘이 앉아있어요. 조금만 더 가면 떨어져 죽을 것 같은데 조금씩 자리를 조여줍시다!" 정말 눈물나게 고마운 목소리였죠. 이렇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열차안에 발을 들여놓았답니다. 옥별이와 엄마는 간신히 열차 발판에서 나와 열차안으로 들어갔답니다.

열차안은 마치도 콩나물시루와 같이 사람들로 빼곡하더군요. 두발로 서서 가도 힘이 든데 너무도 사람이 많이 한쪽 발로(다른 한 발은 어디로 갔는지 모름.) 서서 사람, 사람들사이에 끼워서 힘들게 힘들게 지쳐갔죠. 이렇게 2틀간에 걸쳐서야 옥별이네 "신성천"에 도착하였답니다. "신성천"에서부터는 평양이 가깝기 때문에 안전원들의 단속이 엄격하죠. 여행증명서가 없는 옥별이네도 "신성천"역에 내렸답니다.(신성천에서 한 100리인가(?), 정도 나가면 성천군이 있답니다.)

"신성천"역에 내렸는데 여행증명서가 없어서 몰래 빠져나가야 했답니다. 엄마와 옥별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는데 "신성천"역에서 근무하는 어떤 사람이 우리를 붙잡더군요.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길래 김책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사람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 신성천군 아줌마들이(장사군) 김책에 가면 사람대접을 안한다고 하는데 당신들도 한번 당해보시오"

참 어처구니 없죠? 이게 다 독재자 김정일이 만들어놓은 지역과 지역사이의 악감정들이죠.
이렇게 옥별이와 엄마는 성천군사람들에게 엄청 수모를 당했답니다. 나중엔 너무 당하다나니 옥별이 정신이 획~ 돌더군요. 무심결에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정신병자처럼 굴었죠.(세상이 너무도 각박하니 악 밖에 남는 것이 없더군요.)

그 사람들 뜻밖의 돌변상황에 다음부턴 여행증명서 떼어가지고 다니라면서 그냥 보내더군요.
"신성천"부터 평양까지 걸어가야만 했답니다. 먼저 "신성천"에서 "성천군"까지 100리(잘은 모르겠는데 반나절을 걸어갔죠.)길을 걸어갔죠. 버스는 커녕 말달구지도 하나 없더군요.
옛날처럼 그냥 두발로 걷는게 제일이였져. 정말 지루하더군요. 성천군은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 아무리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았죠. 성천군에 도착한 옥별이와 엄마는 아는 사람 집에 찾아 들어가 하룻 밤을 보냈죠.

아침 9시 주인 아저씨가 가는 길에 먹으라고 삶은 고구마 4알을 주더군요. 성천에서 평양까지는 200리 길이랍니다. 걷기 경기에 참가한 선수 마냥 엄마와 옥별이는 쉬지 않고 발을 부단히 놀렸답니다. 강동에 도착했는데 무슨 긴 터널 같은 것이 있더군요. 그 긴 터널을 통과해서 계속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를 단속하였답니다. 노동적위대라고 하더군요. 대뜸 우리보고 여행증명서를 보자고 하길래 주츰거리니까 따라오라고 하면서 몇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려가더군요.

알구보니 그사람들도 여행증명서가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양 출입을 막기 위해서 노동적위댄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 통행증 없는 사람들을 단속하고 있었죠.) 한번도 이런 일을 당한적이 없는 엄마와 옥별이는 무척 불안했답니다. 혹시나 강제노동판에 보내서 노동을 시키지 않는지, 감옥에 집어 넣지나 않는지... 별의별 생각이 들더군요. 한마디로 두려웠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뒤쪽에 보니 도랑창(물이 흐느게 땅을 파놓았음)이 있었습니다.

옥별이는 엄마보고 같이 화장실을 가자고 했죠. 그러면서 가지고 있던 물건을 옆의 아줌마한테 맡기고 그 도랑창쪽으로 다가갔죠. 단속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만 살피더군요. 이때 옥별이와 엄마는 손을 꼭 잡고 도랑창에 뛰어 내려 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었답니다. 그 과정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나요? 북한에 이런 말이 있져.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다."
....

드디여 대성산에 잇는 지하철역에 도착하였져. 그때가 밤 9신가? 어슬어슬 하더군요. 전철역에 들어가 할머니네 집 쪽으로 가는 차에 앉았답니다. 평양 시민들, 옥별이와 엄마를 그 무슨 외계인을 보듯이 자세히 보더군요.(지방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보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평양에 들어오기 까지의 고난들을 돌이켜보며 안도의 휴식을 하고 있었죠.

봉화역(전철 역)에 내려 할머니네 집에 찾아들어갔답니다. (평양 제 2백화점 있는데 있었죠.) 할머니네 집 초인종을 누르니 사촌 동생이 뛰어나오더군요. 문을 연 동생은 우리를 보고 너무 놀라 "할머니, 왕고모(옥별이 엄마를 왕고모라고 부름)네 왔어."하고 소리치더군요. "뭐라고" 라는 소리와 함께 뛰어나온 할머니 엄마(할머니 맏딸)와 옥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더군요.
엊그제 지방에 내려간 것 같은데 1년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고 하면서 ... 말을 잇지 못하시더군요. 할머니 얼른 부엌에 나가 흰 쌀밥을 가득 담아오시며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주제비(몸상태) 이런가고 꾸지람을 하시더군요.

밥을 먹으면서 할머니에게 신성천에서부터 평양까지 걸어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할머니는 연신 눈물을 훔치시더군요. 이렇게 간신히 평양에 도착한 옥별이와 엄마는 며칠동안 평양에서 시름놓고 지낼 수 있었죠.

이 외에도 추방지에서 겪은 일들 너무도 많습니다. 땔 나무가 없어 엄마와 옥별이 둘이서 산에 나무하러 가서 남이 쳐놓은 소나무 잎들을 가득 주어온일, 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아빠, 엄마와 함께 먼 산에 가서 달래 캐던 일, 김책에서 혜산까지 높은 산들을 넘어 10흘동안 걸어 간 일(정말 끔찍했져.), 등등 ... 다 쓰고 싶은데 옥별이 머리 한계가 여기까지예요.

죄송함다.

1999년 옥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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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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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별 2005-05-01 00:18:29
    아픈 기억들을 해학적으로 서술했네요. 작가 기질이 보인다고 할까요?
    그 엄청나고 어려운 일을 특유의 성격으로 헤쳐나온 점도 높이 사고 싶네요. 그리고 옥별(씨)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이곳에서도 잘 적응하고 쾌활하게 지내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런 수기도 계속 쓰고 다른 글들도 써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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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즐넛 2005-09-24 02:39:06
    17년동안 북한에서 자라오셨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겠군요. 나름대로 남한에서 적응하여 글씀씀이도 제법 친근하게 쓰셨는데 왠지 모르게 서글픈 느낌이 듭니다. 일부러 그렇게 적으신것 같은 느낌도 들구요. 같은 북한이라도 평양과 지방은 차이가 많은 것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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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길에서 2006-03-14 11:26:03
    살아 있어주어 고맙다
    힘내서 살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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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별이 2006-04-10 13:08:43
    한국에 온 해에 쓴 글입니다.
    7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읽어보네요.
    그때는 죽고싶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참 인간이라는 것이...

    그때의 생활을 거의 잊고 살고 있었네요.
    글을 적어놓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여. 내가 이렇게 살았던가 싶어여.

    열심히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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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을향해쏴라 2006-06-25 01:15:02
    흐음 ㅡㅡ;;;; 기분나쁘실지 모르지만..참 드라마틱하게
    살아오신듯 ;; 홧팅이오 ~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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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절 2007-04-12 05:54:38
    거 대개 귀엽게 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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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다 맞어~ 2007-12-22 14:54:32
    그때에는 피눈물을 흘리시면 걸어온길이라는걸 잘 알것 같아요. 항상 하시는 일마다 즐거우실 꺼예요. 그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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