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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헤어져 50여 년의 긴 세월(1) - 최정화
동지회 16 7771 2005-10-26 11:16:21
헤어져 50여 년의 긴 세월…

최 정 화(함북도 회령시 가정부인)

이 글은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 여인의 기록이다. 북한에서 산 59년의 세월동안 행복했던 추억은 찾을 수 없었다는 그녀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담담하게 풀어 쓴 한 여인의 인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북한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헤어져 50여 년의 긴 세월”의 연재를 시작한다.

여는 글

나는 북한에서 사는 동안 늘 헤어진 부모님을 만나기를 바라며 그리워했다. 이제 그 꿈을 이루었고 따뜻이 손잡아주며 격려의 힘을 주는 동포들의 진심 어린 축복속에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행복했던 추억은 찾을 수 없고 모진 풍파로 찢기고 멍들어 성한 것 없는 59년의 세월만이 아프게 다가온다. 월남자 가족이라는 죄 아닌 죄로 길가의 막돌처럼 천대 속에 짓밟히며 억울하게 살아야했던 나의 인생을 돌아보니 눈물만이 쏟아진다. 가슴 깊이 저려오는 지난 인생을 애써 더듬어 보려고 한다.

유년 시절

나는 1938년 7월 평양시 신양리에서 (현재 평양시 중구역) 아버지 최순철, 어머니 최경화의 맏딸로 태어났다. 내 고향은 참으로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집 앞으로는 작은 개울물이 흐르고 집 뒤에는 아담한 야산도 있었다. 봄이면 여러 가지 나물과 꽃들이 피어났고 친구들과 산에 올라 나물도 뜯고 꽃놀이도 하며 즐겁게 놀곤 하였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림석역이 있었고 역에서 기차를 타면 평양까지 한시간이면 들어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추억 속에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버지와 관련된 일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46년 1월 어느 날 셋째 삼촌 결혼식 날에 북한 보안기관에서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 아버지를 체포하려고 살벌하게 집 안팎을 뒤지며 총을 쏘아대던 보안서원들의 살기 띤 모습이다.
아버지는 8.15해방 후 조만식 선생님과 함께 건국위원회에서 건국운동을 하셨고 김일성을 반대하여 투쟁하셨다고 한다. 해방 후 김일성은 소련의 사주 하에 공산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그를 반대하는 민주주의 애국자들을 모두 말살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고, 건국위원회 위원장으로 애국사업을 하시던 조만식 선생님을 비롯한 진정한 애국주의자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체포, 처형하였다. 나의 아버지도 건국운동을 하셨다는 이유로 처형대상으로 지목되어 피신하고 계셨다고 한다.
삼촌 결혼식 날에 들이닥친 보안서원들은 3살 된 나의 남동생에게 “아버지가 사탕 사 가지고 왔지. 아버지 지금 어디 있냐”고 따져 묻기도 하고, 혹시 지하실이 있어 거기에 숨어있는가 싶어 쇠막대기로 마당을 쿵쿵 내리쳐도 보고, 집안에 들어와서 집안 천장 위에 대고 여기 저기 총질을 해댔는데 다행히 천장 대들보에 은신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무사하셨다. 밖으로 나온 보안원들은 아버지 친구를 집 뒤에 있던 잣나무에 매달아 놓고 때리며 간 곳을 대라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래도 아버지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젖먹이 여동생을 업고 계시던 어머니를 체포하여 보안서로 끌고 갔다. 어머니는 보안서의 차디찬 감방에서 일주일간 고문을 당하여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오셨다. 아버지는 1946년 2월에 서울로 떠나셨고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버지도 안 계시는 집에서 나와 두 동생을 키우시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11명이 되는 대 가정의 맏며느리로 마음 고생, 육체적 고생을 감당해 내셔야 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두엄을 지게에 지고 밭으로 나가 하루 종일 일하셨고 저녁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을 짓고 빨래를 하셨다. 어린 내 가슴에도 땀방울이 마를 새 없이 궂은 일을 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한없이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날 나는 큰 물독에 있는 물을 동이에 옮겨 담아 놓고 “내가 물을 길어 왔으니 어머니 물길으러 안 가셔도 된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님은 동이에 담겨진 물을 보시고 우리 딸 인제는 다 자랐다고 기뻐하시며 물을 떠 마시면서 등을 보이셨다. 눈물을 보이실까봐 그러셨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어머님께 거짓말을 하여 미안하다는 생각보다 ‘어머니가 지친 몸으로 또 물을 길으러 가셔야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울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인민학교에(초등학교) 들어 갈 나이가 되었다.

잊지 못할 추억 속의 노래

나는 1947년 평안남도 강동군 대성인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2~3개월 다니다가 학교가 해산되어 광명 인민학교로 전학하였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다. 아버지가 안 계셔도 구김살 없이 학급반장, 분단위원장을 하며 써클활동도 열심히 했다. 농장과 공장으로 공연도 다녔는데 그런 나를 보시며 어머니는 무척이나 대견해 하셨다.
인민학교 2학년 어느 날 어머님은 나에게 “서울에 가서 아버지를 찾은 다음 데리러 오겠으니 그 동안 학교에도 잘 가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길 떠날 돈을 마련하시기 위하여 이불솜도 시장에 내다 팔고 가는 길에 동생들에게 먹일 음식도 사오시며 먼 길 떠날 준비를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으러 가신다는 말씀을 하신 뒤부터 학교에 가서도 ‘어머니가 나 몰래 떠나시면 어쩌나.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안 돌아오시면 나는 어떻게 사나’ 하는 불안감에 겁이 나고 눈물이 앞을 가려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공부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 생각도 하지 않고 쫓기듯이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가 엎어지듯 문고리를 잡아 제치고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면 안도의 숨을 내쉬고 땀을 씻곤 하였다. 이러는 나를 측은히 바라보시던 어머님이 불안해하는 내 마음을 달래주시려고 무릎에 앉히시고 조용히 노래를 가르쳐 주시었다.
나는 50년의 눈물어린 긴 세월동안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어머님이 데리러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금도 이 노래를 떠올리노라면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 눈물이 난다. 어머님이 가르쳐 주신 노래를 적어본다.

오동나무 비바람에 잎 돋는 이 봄
그리웁던 동무들이 모였습니다.
이 비가 그치고 날이 맑으면
내 동무도 움 돋쳐 떠나갑니다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까지
되돌아 꽃이 피고 새우는 이 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다 모여라
춤추며 봄 노래 부르자

어머님과의 생이별

1948년 10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와 두 동생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아찔해 졌다. 금시 울음이 터져 나왔고 엄마를 찾으며 집 안팎을 정신없이 헤매었다. 이러한 나를 보시고 할아버지는 “엄마는 아버지를 찾으러 가셨으니 곧 다녀온다”며 달래셨다. 어린 자식을 두고 기약할 수 없는 먼길을 떠나신 어머님의 마음은 오죽 하였으련만 그 때 철없던 나의 가슴속에는 나를 혼자 두고 떠나가신 부모님들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에 울고 또 울었다. 한참을 울다 혹시라도 엄마으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다락에 올라가 키 돋음 하여 저 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엄마를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지만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서러웠던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진다. 그 날의 서러움은 50여 년 긴 세월 내 가슴에 쌓이고 쌓여 치유될 수 없는 한이 되었다.
몇 시간을 혼자 울다 지쳐 쓰러져 있는데 어머니가 데리고 간 줄 알았던 남동생 철이가 할머니와 함께 돌아왔다. 동생에게 왜 엄마를 따라 가지 않고 돌아왔느냐고 물었더니 동생의 말이 “할머니가 기차가 떠날 때 동생을 주지 않아 어머니가 울며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엄마는 인제 가면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너만이라도 기어이 따라갈 것이지 어째서 돌아왔냐”며 또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를 세상의 전부로 알고 응석을 부리며 자라오던 어린 나에게는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의 이별은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청천벽력 같은 고통이었고 모진 상처가 되어 쓰리고 아팠다. 엄마가 떠나가신 후 내게 보이고 와 닿는 모든 것이 서럽게만 안겨와 말수가 적어졌고 밝고 명랑하던 얼굴에는 어둠의 그늘이 드리웠다.
인민학교 5학년 때인 1950년 6월초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인제 곧 남북이 통일되고 헤어진 사람들이 모두 만나게 된다고 말하였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는 머지않아 부모님들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뛰었고 학급 아이들도 자기 일처럼 나를 보고 기뻐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비행기가 폭격할 때 어느 방향으로 피하며 눈, 코, 귀를 막고 어떻게 엎드려야 한다는 방법까지 가르쳐 줬다. 학교 운동장에는 톱날 식으로 방공호를 팠고 그 위와 학교 지붕 위에 소나무 가지와 풀을 베어 위장을 하는 등 학생들에게 전시에 대처할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을 시켰다.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방공호를 팠다. 이 모든 것이 동족 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역사로 기록될 6.25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철저한 계획 하에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6.25전쟁. 희망이 사라졌다.

36년간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겨우 5년밖에 되지 않은 조선은 또다시 동족간의 전쟁 즉 한반도를 독재하려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1950년 6월 25일, 남북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모든 학교들은 문을 닫고 대학생, 고급중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원들도 50세까지 모두 군대에 뽑혀 나갔다. 마을과 거리, 산과 들, 산천초목들은 폭격의 불길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처참하게 쓰러지고 죽어갔다.
젊은 청장년들이 있는 집들에는 인민군대 발령장이 떨어졌다.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전쟁터로 자식과 형제. 남편들을 떠나보내며 하염없이 우는 가족들, 군대 가지 않으려고 산 속으로 도망하는 사람들, 고의로 손가락 발가락을 자르는 사람들, 할미꽃 뿌리를 무릎에 문질러 심한 상처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 속으로 도망한 사람들은 군 도피 분자라고 하여 혈안이 되어 찾아 다녔고 잡히면 전시범에 걸어 가차없이 처형해 버렸다.
전쟁이 일어난 후.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일손을 도왔다. 북한의 당국자들은 후퇴하면서 월남자 가족들을 모두 잡아서 방공호에 몰아 넣고 총살하였다. 그들의 만행의 손아귀가 우리 집에도 뻗쳐오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 친구 되시는 분이 숨가쁘게 달려와 보안서원들이 우리 식구들을 잡으러 오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고 하였다. 우리 식구들은 맨 몸으로 강냉이 밭과 목화 밭 속으로 기며 내달리며 산 속으로 들어가 먹지도 못하고 추위 속에서 공포에 떨었다. 할아버지 친구 분 중에 임평이라고 월남자 가족이었는데 아들과 함께 방공호에 끌려가서 내무원이 쏜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아들은 팔에 부상을 입고 도망쳐 숨어 있다가 국군이 들어오자 다시 나타나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다녔다.
북한 당국자들은 전쟁 때 무고한 월남자 가족들을 총살한 용서 못할 만행을 가리기 위해 국군이 북한 보안서원들의 옷을 입고 월남자 가족들을 죽였다고 터무니없는 날조를 하였다.
며칠동안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포격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불빛 한 점 없던 마을의 여기 저기서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올랐다. 1950년 10월 18일 국군들이 평양과 우리 마을에도 들어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들과 나는 부모님과 삼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으로 경사가 난 듯이 기뻐했다.
국군이 들어온 며칠 후 내가 살던 곳에 대성국민하교가 섰는데 나도 국민하교에서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군복을 입은 젊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하나님의 은혜 속에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는 신비한 말씀을 하였다. 전쟁 전 우리 학급에 예수 믿는 친구가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일요일이면 꼭 학교에 불러내곤 하였다. 그 친구를 데리러 가서 온 식구가 기도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김일성 장군님을 높이 모셔야 된다는 말만 들어오던 학생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고 신비하였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하나님이 어떤 모습일까 하며 제가끔 나름대로 생각하고 말하였다. 우리들은 다른 수업시간보다 국군 복을 입은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것은 말씨도 곱고 우리가 들어보지 못하던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즐겁고 평화로웠던 그 기쁨은 며칠가지 못하고 꿈을 꾼 것 마냥 깨어지고 말았다.
1950년 11월말이라고 생각된다.
다정하셨던 선생님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 집에서 멀리보이는 도로로 사람들이 인 해를 이르며 어디론가 줄달음치듯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급히 그곳으로 갔다오시더니 큰일났다며 모두들 피난을 가는데 빨리 떠나야 38선을 넘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 둘째 삼촌이 할아버지에게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주며 이 주소로 빨리 와야만 살 수 있다며 국군들과 함께 차를 타고 먼저 남쪽으로 떠났다.
우리 가족은 짐을 꾸려 가지고 셋째 작은어머니가족과 같이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피난길에 올랐다. (셋째 삼촌은 8.15해방 후 월남하셨다.) 둘째 작은어머니는 4살 난 맏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일행을 따라 나섰다.
국군이 후퇴 할 당시 북한에 고향을 둔 많은 사람들이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은신하기 힘든 늙은이들과 병자들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마을에서 40~50리 벗어나 있는 중화군 일등도로에 들어섰다. 도로에는 피난민들로 꽉 차 있어서 앞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갈 정도였으며 손을 꼭 잡고 걸어야지 자칫 손을 놓치게 되면 가족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피난길에 처자식 형제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생사를 걸고 오직 앞으로만 밀고 나가는 피난민들의 행렬은 각양각색이었다.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가는 사람, 맨몸에 아이만 업고 내달리는 아낙네들, 대열을 지어 급히 가는 젊은 청장년들,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짧은 다리를 재게 놀리며 달려가는 어린아이들, 어디선가 “정수야, 정수야”하며 잃어버린 가족을 목이 터져라 찾는 소리도 들려오고 겁에 질린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세상이 끝나는 것만 같은 대 난리 통이었으며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북한 땅에 남아있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밤이 되어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마을에 내려가면 은신 못하는 노인들만 몇 명 남아 있었다. 동네 사람들 다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니 모두 남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어쩌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는지 나라가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이런 변이 또 어디 있냐”고 한숨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난 가던 사람들은 빈집에 들어가 자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집의 쌀과 부식물, 심지어 가축까지 잡아먹기도 하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잠자리가 없는데도 앉아서라도 같이 자 자며 비집고 들어오고 부엌에 가마니와 벼 짚을 깔고 자기도 했다. 12월 추운 겨울이어서 얼어든 몸이라도 녹이려고 탈곡하지 않은 볏단에 불을 피우자 쌀알이 하얗게 튀어 났고 집주인들이 낟가리 속에 숨겨놓았던 물건들이 나와 뒹굴어 다녔다.
그렇게 며칠간의 혼잡한 피난길을 정신없이 내달려 오후 4시경 황해도 미루골에 이르렀다. 중화군에 이어 황해도로 쭉 뻗어 지나간 일등도로에 들어서는 순간 어디에 발을 놓을지 모를 정도로 온통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있었고 그 처참함은 이를 데가 없었다. 죽은 사람의 잘린 다리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고 하체는 없고 상체만 남은 시체, 달구지가 지나갔는지 자동차가 지나갔는지 납작하게 짓눌린 시체, 이런 처참한 참변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흐려지고 갈 길을 잃고 걸을 수가 없었다. 말 못하는 짐승인 소들도 시체를 타고 넘지 않으려고 채찍질을 해대도 다리를 버티고 서 버렸다. 길옆 빈집에는 3살, 4살, 6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 차가운 방에 이불을 쓰고 모여 앉아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어른들이 부모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저기서 죽었다며 도로 쪽을 가리켰다. 또 엄마는 죽었는지 혼자 피난을 갔는지 아기만이 전봇대에 묶여 울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아기는 얼마 못 가서 얼어죽었을 것이다. 어느 착한 사람이 불쌍히 여겨 데려가기 전에는... 아니 그럴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상황에서는 제 한 몸, 제 가족 챙기기도 어려웠다.
전봇대와 집 벽에는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남긴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간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해주를 15리 앞둔 황해도 벽성군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비행기 폭격소리가 아치러지게 들려왔다. 우리가 건너야 할 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다. 더 이상 남쪽으로 갈 수가 없어 강기슭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때 전투기편대가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 위를 흩으며 기총사격을 해댔고 나는 언제 어떻게 넘어졌는지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고 하니 시체가 내 위에 덮여 있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겨우 안간힘으로 시체 속에서 빠져 나와보니 어디서 흘렀는지 온몸이 피에 젖어있어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주변에는 부상당한 사람들의 아우성이었고 가족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는 소리가 그야말로 피바다 속에 처절히 들려왔다. 우리 가족 중에서도 작은어머니의 친정 아버지가 복부에 기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난리 속에서도 누군가 우리 소를 끌어가고 달구지와 짐만 뎅그렁하니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피난길의 짐 실은 달구지들 속에서 수류탄과 무기가 발견되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비극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너무나 처참하고 억울한 민족의 수난이었다.
작은어머니 가족은 시신을 안장하고 다음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나머지 우리 가족은 황해도 벽성군 산골로 들어가 집부터 잡고 서울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형편을 알아보려고 해주로 가셨다가 3일만에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셨다. 포연 속에 휩싸인 남쪽으로 뻗은 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얼마 안가면 부모님이 계시는 곳인데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하여 너무나 안타까워 전에 기도하던 기독교 신자 친구모습이 떠올라 혼자 엎드려 울며 제발 살아서 부모님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럴 때면 할아버지와 할머님은 거기 엎드려 뭘 하느냐고 꾸중하셨다. 그러시거나 말거나 나는 밥을 먹은 후에는 방안 구석에서 계속 기도 드렸다.
그 집에서 약 15일 정도 있었는데 인민군대와 중국지원군이 나왔다. 북한에는 다시 자위대와 행정기관, 법기관들이 섰고 모든 피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고향으로 가라는 재촉 때문에 그 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우리 가족은 갈 곳이 없었다. 평양에 한국군이 들어왔을 때 둘째 삼촌은 학교 교장을 했었고 할아버지와 막내삼촌은 나쁜 일은 하지 않았지만 치안대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가 멸족을 당할 것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타고 그 곳에 계속 있으면 의심받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황해도 황주로 가서 할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차씨 할아버지의 형님 집에서 겨울을 났다. 그때부터 나는 폭격에 죽지 말고 부모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내 나이 13살이었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네 집에서 기도하는 것도 보았고 국군선생님의 말씀도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만 같았다.
황주는 사과가 많이 나는 곳이다. 할머니와 고모, 나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 사과장사를 하였다. 나는 바구니에 사과를 담아 가지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중국지원군에게도 팔고 길가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사과를 사주길 바라며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황주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봄이 되었는데 살던 곳이 어딘데 왜 집으로 가지 않느냐고 삼촌에 대해서 캐물으며 의심하였다. 당시 젊은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어지간히 심하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잡아 가두고 따지고 고문을 해댔다. 치안대에 가담했던 사실이 밝혀지면 상부의 지시 없이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사람들이 모여들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이런 무시무시한 형편에서 삼촌은 바깥출입도 못하고 땅굴 속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주인집 밭에 거름을 내는 척하며 가마니에 삼촌을 넣어 지게에 져서 마을을 벗어나 내려놓으시고 할아버지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만석면 어디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하루 먼저 떠나보내셨다.
당시 삼촌 나이 20살 정도였고 그렇게 헤어진 후로 지금까지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가는 도중에 잡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할머니는 삼촌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을 치며 삼촌이름을 부르면서 우셨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이 보고 들을까봐 마음놓고 울지도 못하셨다.
다음날 우리는 황주를 떠나 다시 북쪽으로 향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어서 한숨쉬며 우리를 이끌고 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쓰리고 아픈 심정을 알지 못하고 엄마 아빠가 있는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되돌아 먼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안타깝고 짜증만 났다. 발이 아파 신발을 벗고 맨 버선발로 절룩거리며 걸어가던 9살 난 내 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안겨와 가슴이 저려난다.
세 아들이 있는 한국의 문전에 왔다가 앞으로 일가족의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어른들의 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앞이 캄캄하셨을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들들 생각에 넋을 잃고 먼 산을 바라보시다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시곤 하셨다. 네 아들과 생이별을 하고 슬하에 막내아들과 외동딸만이 남았다. 우리는 낮에는 빈집을 정해 잠을 자고 밤에만 걸었다. 인민군들이 쫙 깔려 곳곳에서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무지막지하게 수색을 하고 지치고 다친 피난민들의 몸과 마음을 더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였다. 우리 짐을 뒤지던 인민군군관은(장교) 할아버지가 신고 있는 장화를 보고 군수품이라며 빼앗아냈다.
힘겨운 속에 고달프고 지친 몸을 겨우 이끌어 할머니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돌 고개에 당도했다. 할머니의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집을 한 채 얻어 2년 가까이 살았다. 그곳은 산림이 울창하고 밤나무도 많았으며 버섯도 많이 돋아나는 깊은 산골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밤도 주어오고 버섯도 따고 맷돌 돌리는 일, 절구질을 하며 집일을 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님이 매일과 같이 남의 밭 김을 매주고 품삯으로 받아오는 식량으로 한끼한끼 연명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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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인생 2

6.25전쟁, 희망이 사라졌다.

북한 땅에 남아있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밤이 되어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마을에 내려가면 운신 못하는 노인들만 몇 명 남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니 모두 남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어쩌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는지 나라가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이런 변이 또 어디 있냐”고 한숨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난 가던 사람들은 빈집에 들어가 자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집의 쌀과 부식물, 심지어 가축까지 잡아먹기도 하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잠자리가 없는데도 앉아서라도 같이 자자며 비집고 들어왔고 부엌에 가마니와 벼 짚을 깔고 자기도 했다. 12월 추운 겨울이어서 얼어든 몸이라도 녹이려고 탈곡하지 않은 볏단에 불을 피우자 쌀알이 하얗게 튀어 났고 집주인들이 낟가리 속에 숨겨놓았던 물건들이 나와 뒹굴어 다녔다.
그렇게 며칠 간의 혼잡한 피난길을 정신 없이 내달려 오후 4시경 황해도 미루골에 이르렀다. 중화군에 이어 황해도로 쭉 뻗어 지나간 일등도로에 들어서는 순간 어디에 발을 놓을지 모를 정도로 온통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있었고 그 처참함은 이를 데가 없었다. 죽은 사람의 잘린 다리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고 하체는 없고 상체만 남은 시체, 달구지가 지나갔는지 자동차가 지나갔는지 납작하게 짓눌린 시체, 이런 처참한 참변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흐려지고 갈 길을 잃고 걸을 수가 없었다. 말 못하는 짐승인 소들도 시체를 타고 넘지 않으려고 채찍질을 해대도 다리를 버티고 서버렸다. 길 옆 빈집에는 서너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 차가운 방에 이불을 쓰고 모여 앉아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어른들이 부모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저기서 죽었다며 도로 쪽을 가리켰다. 또 엄마는 죽었는지 혼자 피난을 갔는지 아기만이 전봇대에 묶여 울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아기는 얼마 못 가서 얼어죽었을 것이다. 어느 착한 사람이 불쌍히 여겨 데려가기 전에는. 아니 그럴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상황에서는 제 한 몸, 제 가족 챙기기도 어려웠다. 전봇대와 집 벽에는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남긴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간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해주를 15리 앞둔 황해도 벽성군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비행기 폭격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우리가 건너야 할 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다. 더 이상 남쪽으로 갈 수가 없어 강기슭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때 전투기 편대가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 위를 훑으며 기총 사격을 해댔고 나는 언제 어떻게 넘어졌는지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고 하니 시체가 내 위에 덮여 있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겨우 안간힘으로 시체 속에서 빠져 나와보니 어디서 흘렀는지 온몸이 피에 젖어있어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주변에는 부상당한 사람들로 아우성이었고 가족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는 소리가 그야말로 피바다 속에 처절히 들려왔다. 우리 가족 중에서도 작은어머니의 친정 아버지가 복부에 기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난리 속에서도 누군가 우리 소를 끌어가 달구지와 짐만 뎅그렁하니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피난길의 짐 실은 달구지들 속에서 수류탄과 무기가 발견되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비극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너무나 처참하고 억울한 민족의 수난이었다.
작은어머니 가족은 시신을 안장하고 다음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나머지 우리 가족은 황해도 벽성군 산골로 들어가 집부터 잡고 서울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형편을 알아보려고 해주로 가셨다가 3일만에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셨다. 포연 속에 휩싸인 남쪽으로 뻗은 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얼마 안가면 부모님이 계시는 곳인데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하여 너무나 안타까워 전에 기도하던 기독교 신자 친구모습이 떠올라 혼자 엎드려 울며 제발 살아서 부모님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럴 때면 할아버지와 할머님은 거기 엎드려 뭘 하느냐고 꾸중하셨다. 그러시거나 말거나 나는 밥을 먹은 후에는 방안 구석에서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 집에서 약 15일 정도 있었는데 인민군대와 중국지원군이 나왔다. 북한에는 다시 자위대와 행정기관, 법 기관들이 섰고 모든 피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고향으로 가라는 재촉 때문에 그 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우리 가족은 갈 곳이 없었다. 평양에 한국군이 들어왔을 때 둘째 삼촌은 학교 교장을 했었고 할아버지와 막내삼촌은 나쁜 일은 하지 않았지만 치안대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가 멸족을 당할 것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타고 그 곳에 계속 있으면 의심받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황해도 황주로 가서 할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차씨 할아버지의 형님 집에서 겨울을 났다. 그때부터 나는 폭격에 죽지말고 부모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내 나이 13살이었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네 집에서 기도하는 것도 보았고 국군선생님의 말씀도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만 같았다.
황주는 사과가 많이 나는 곳이다. 할머니와 고모,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사과장사를 하였다. 나는 바구니에 사과를 담아 가지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중국 지원군에게도 팔고 길가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사과를 사주길 바라며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황주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봄이 되었는데 살던 곳이 어딘데 왜 집으로 가지 않느냐고 삼촌에 대해서 캐물으며 의심하였다. 당시 젊은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어지간히 심하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잡아 가두고 따지고 고문을 해댔다. 치안대에 가담했던 사실이 밝혀지면 상부의 지시 없이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사람들이 모여들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 때문에 삼촌은 바깥출입도 못하고 땅굴 속에 숨어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주인집 밭에 거름을 내는 척하며 가마니에 삼촌을 넣어 지게에 져서 마을을 벗어나 내려놓으시고 할아버지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만석면 어디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하루 먼저 떠나보내셨다. 당시 삼촌 나이 20살 정도였고 그렇게 헤어진 후로 지금까지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가는 도중에 잡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할머니는 삼촌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을 치며 삼촌 이름을 부르면서 우셨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이 보고 들을까봐 마음놓고 울지도 못하셨다.
다음날 우리는 황주를 떠나 다시 북쪽으로 향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여서 한숨쉬며 우리를 이끌고 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쓰리고 아픈 심정을 알지 못하고 엄마 아빠가 있는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되돌아 먼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짜증만 냈다. 발이 아파 신발을 벗고 맨 버선발로 절룩거리며 걸어가던 9살 난 내 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안겨와 가슴이 저려온다. 세 아들이 있는 한국의 문전에 왔다가 앞으로 일가족의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어른들의 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앞이 캄캄하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들들 생각에 넋을 잃고 먼 산을 바라보시다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시곤 하셨다. 네 아들과 생이별을 하고 슬하에 막내 아들과 외동딸만이 남았다.
우리는 낮에는 빈집을 정해 잠을 자고 밤에만 걸었다. 인민군들이 쫙 깔려 곳곳에서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무지막지하게 수색을 하고 지치고 다친 피난민들의 몸과 마음을 더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였다. 우리 짐을 뒤지던 인민군 군관은(장교) 할아버지가 신고 있는 장화를 보고는 군수품이라며 빼앗아냈다.
고달프고 지친 몸을 겨우 이끌어 할머니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돌고개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할머니의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집을 한 채 얻어 2년 가까이 살았다. 그곳은 산림이 울창하고 밤나무도 많았으며 버섯도 많이 돋아나는 깊은 산골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밤도 주어오고 버섯도 따고 맷돌 돌리는 일, 절구질을 하며 집일을 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님이 매일과 같이 남의 밭 김을 매주고 품삯으로 받아오는 식량으로 한끼한끼 연명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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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3

전쟁이 끝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할아버지, 삼촌들이 치안대에서 일한 것이며 아버지, 어머니가 월남한 것으로 하여 우리 가족을 그냥 두지 않고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1천만 이산가족의 가슴에 창검을 찌르듯 가시 돋친 38선이 가로질러지고 동족간의 서슬 퍼런 대결로 더욱더 얼어붙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포성이 멈추고 전쟁이 끝났다고 저마다 좋아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이산가족들, 월남자 가족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의 시작이었으며 그들의 가슴은 사정없이 찢기고 피멍이 들고 정부의 모진 멸시와 압박 속에도 반항 한번 하지 못하는 벙어리 아닌 벙어리로 살아야 했다.
북한에서는 전쟁에서 흘린 피도 모자라서 또 한차례의 피비린내를 풍겼다. 전쟁으로 뒤죽박죽이 된 주민들의 신분을 조사하고 소위 ‘반동’들에 대한 숙청바람이 불었다. 우리가 살던 집 뒤에는 자위대 본부가 있었는데 매일 치안대에 들었던 사람들을 잡아다 때리곤 하였다. 창문으로 내다보면 자위대원들이 몽둥이로 사람을 빨래 치듯이 때리는 모습이 보이고 비명소리가 그칠 새 없이 들렸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어디론가 다녀오시더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셨다. 몸서리치는 끔찍한 광경 때문에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으셨던 것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도착한 곳은 평안남도 대동군 ○○리 어느 한 동네였다. 마을에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는 할아버지 매형 되시는 분의 주선으로 집을 마련하여 살게 되었다. 땅이 없던 우리 집은 막벌이로 하루하루 살아갔다. 할아버지는 강에서 고기를 잡아다 팔고 전쟁 때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부품으로 그릇들을 만들어 내다 파셨다. 할머니는 남의 집 밭일을 해 주시고 식량을 구해 오셨다. 나도 밥 먹은 후에는 들에 나가 나물을 뜯어 끼니에 보태야 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육리에 작은 할머님이 딸 형제를 데리고 사셨는데 나는 자주 놀러갔었다. 그때마다 부모 없이 자란다고 가엾게 여기시며 각별히 사랑해 주셨고 옷과 신발도 사주시고 먹을 것을 챙겨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자위대원들과 내무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집과 장롱, 찬장, 심지어는 맷돌과 창고에까지 딱지를 붙이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작은할머니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다. 우리가 의지해 살던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시던 작은할아버지도 직위에서 해임되고 노동당에서도 출당을 당했다. 이유인 즉 월남자 가족인 처가식구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작은할아버지 가족은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평양 서성리로 이사하셨고 우리 가족은 몇 번째인지 모를 이사를 또 가게 되었다. 다행히 정전직후에는 거주지 제한을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식량수매사업이 강제적으로 진행되어 전쟁의 상처고 채 가시기 못한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했다. 1인당 수매계획을 주고 제때에 집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붙잡아다 때리고 신문하였으며 쇠몽둥이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집 안팎 구석구석을 뒤지고 땅을 ‘쿵 쿵’ 울려 보고 한줌의 쌀이라도 나오면 사정없이 빼앗아 갔다. 저녁마다 동네 사람들을 집합장소에 모아놓고 수매계획을 못한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았고 노인들과 처녀들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고 찬물을 끼얹어댔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낟알구경을 못하고 산과 들을 헤매며 풀로 연명을 하다가 굶어 죽고 물고기라도 실컷 먹어보겠다며 해변가로 이사를 하여 물고기를 먹고 온 가족이 퉁퉁 부어서 죽었다. 목매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집 식량사정도 매 한가지였다. 독풀을 제외하고는 돼지 풀, 토끼 풀 등 온갖 풀을 뜯어 아침저녁은 풀 죽으로 끼니를 에웠고 점심에는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동생과 나는 친가에서 외가로, 외가에서 친가로 옮겨다녀야 했고 15살부터 농장에 나가 고된 일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엉덩이까지 빠져 들어가는 논밭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들었지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서러움에 잠겨있기보다는 힘든 일에 정신을 쏟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1954년 2월. 16살 나던 해에 자립하여 살아갈 결심을 품고 혼자서 퇴거수속을 하여 평양으로 갔다. 막상 평양으로 가기는 하였어도 어느 친척집에 가야 할지 망설이다 제일 가까운 이모를 찾아갔다. 어머니와 모습도 닮고 성품도 닮은 이모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언니 생각이나 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평양에서 공장에 들어가 일하려고 하였지만 공민증(주민등록증)이 없는 미성년자라고 어디서도 받아주질 않았다. 그 당시에도 만 17세가 되어야 공민증이 발급되었다. 무슨 일이던지 해서 먹고살아야 하겠기에 이모와 함께 소꼴도 베고 강기슭의 자갈도 채취하여 팔고 건설장에서 흙과 벽돌도 져 나르며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고 하였다. 그래도 하루세끼 변변히 먹고살기 힘들었고 식구가 많아 생활이 어려운 이모 집에만 계속 있을 처지도 못되었다. 하여 친척집들을 이 집, 저 집 찾아다녔고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 이 집에 가서는 저 집에서 밥 먹고 왔다고 하고 또 저 집에 가서는 이쪽 집에서 밥 먹고 왔다고 하며 먹는 때보다는 굶는 때가 더 많았다. 그때 몸이 얼마나 쇠약해지고 말랐던지 생리조차 되지 않았다.
정전직후 평양에는 전쟁 때 부모 잃고 거지가 된 아이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걸식하였다. 나도 거기에 휩쓸릴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으나 부모님들 욕보일까봐 내 인생을 망칠 것 같아 차마 그 곳에는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군가 부잣집 식모 살이로 들어가라고 했을 때 대문 밖을 나서는 내 나이 또래의 세라복 입은 여학생을 보는 순간 건설장에서 등뼈가 휘도록 벽돌 짐을 지어도 식모살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그러기를 그 몇 번. 세월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들을 그리며 뼈에 사무치는 고아의 설움 속에 주린 창자를 끌어안고 밤길을 헤매며 흘린 눈물, 시름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이모네 집으로 찾아갔다. 이모는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나를 붙잡고 “미안하구나. 굶어도 같이 굶고 죽을 먹어도 같이 먹자”며 다른데 가지말고 함께 살자고 하였다. 그런데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유일하게 지탱해 오던 이모가 하루아침에 추방되어 어디론가 실려갔다. 이모부는 무기징역을 가고 이모네 가족은 통제구역(수용소)으로 실려간 것으로 안다. 무슨 죄로 어디로 실려 갔는지는 그 어디서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이모네 소식은 영영 끈기고 생사를 알지 못한다.

남편과의 첫 만남

봄이다. 저 하늘의 따뜻한 햇빛을 가득히 받으며 온갖 꽃들이 그 모습을 뽐내기라도 하듯 촉촉한 꽃잎을 살며시 펼치고 향기를 풍기며 아름답게 피어나고 나뭇잎들이 파릇하게 움을 틔운다. 나는 언제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을까. 봄은 왔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실까. 할머니 집에 두고 온 동생은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 등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그리는 마음에, 서러움에 눈물이 나고 마음이 한없이 슬퍼졌다. 봄이면 봄대로 아름다운 자연모습에 지나온 슬픈 일들이 떠올라 울고, 여름이면 여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나도 모르게 슬퍼져 울고 또 운다. 남들은 울다 보면 눈물이 마르고 담담해 진다고들 하더니만 나는 왜 울면 울수록 자꾸만 눈물이 솟구치고 걷잡을 수가 없는지...
온갖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은 자꾸만 흘러 어느덧 내 나이 만 17세가 되어 공민증을 가지게 되었고 평양시 보통강 구역에 있는 석암건재공장에서 취직하여 합숙생활을 하며 초자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휘발유 등잔불에 유리관을 녹여 병원에서 쓰는 실험용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빈 몸 하나 건사할 데 없이 떠돌아다니며 고생하다가 직장도 갖게 되고 잠자리도 마련되니 정말 꿈만 같았다.
1957년 7월경 공장에 제대군인들이 배치되어 왔다. 그들 속에는 전쟁 중 의용군으로 북으로 온 이우재, 김정복이라는 남한 출신의 제대군인들도 있었다. 그들과 나는 혼자라는 외로움의 공통점으로 서로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해 주면서 친숙하게 지내게 되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곤 하였다. 그런 과정에 남편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자식들에게 그때의 추억을 들려주면서 같이 웃고 인제는 고인이 된 남편을, 아이들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남편을 봤을 때 첫 인상은 보통 키에 다부지고 얼굴은 미남형이었으며 인정 많겠다는 느낌이었다.
20살 나던 어느 날 일을 하고 있는 내게 그가 다가와서는 “정화동무, 잠깐 시간 있으면 얘기 좀 할까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서는 서울 말씨로 조용조용히 말을 하였다. 나 역시 사람들이 있어 너무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고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 했다. 퇴근길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앞에 다가오더니 “우리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면서 삽시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면서 “난 아직 나이도 어리고 또 일찍 결혼할 마음이 없어요”라고 대답하고는 급히 합숙소로 달렸다. 그 뒤 난 ‘나 하나만도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데 어쩜 똑같은 처지의 사람이 내게 결혼하자고 할까.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는 사람이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헤어진 후에 그는 친구들을 통해서 만나자고 하고 그래도 안 되자 직장 간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여 끝내는 서로 만나게 되었다.

내게도 가정이 생겼다

1958년 2월 9일 우리는 서평양 역전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풍성한 잔칫상도 차려놓고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식을 올렸건만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쓸쓸하기만 하였다. 남편도 9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떠돌며 헤매다가 6.25전쟁 때 형제들도 모르게 16살 어린 나이에 의용군으로 북한에 강제로 끌려가 외로움과 서러움을 안고 눈물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더 거절 못하고 청혼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기구한 운명을 가진 우리 두 사람의 결혼식은 기쁨보다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과 서러움이 더 컸으니 남편과 나는 오열을 터뜨리며 눈물로 밤을 새웠다. 설사 밥 한 그릇에 물 한 그릇 올려놓은 잔칫상이라도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있었다면 그다지도 슬픔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다면 얼마나 대견해 하며 기뻐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남다른 아픔을 안고 만난 사람들이었기에 우리 부부는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는 마음도 유달랐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북세동에서 공장에서 마련해준 자그마한 방 한 칸짜리 집에 이불 한 채와 밥공기, 국그릇 2개, 냄비 1개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공장합숙생활을 하다가 가정살림을 하자니 모르는 것이 많아 속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연탄불이 사늘하게 꺼져있었고 불을 지필 줄을 몰라 남편이 불을 피워주었다. 그보다 더 난감한 것은 음식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피워준 불에 성급히 밥을 하고 동탯국을 끓여 상위에 올렸는데 한술 뜨던 남편이 출근시간이 늦어 저녁에 돌아와 먹겠다며 별다른 기색 없이 출근하는 것이었다. 별로 시간이 늦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이상하여 밥과 국을 먹어보았더니 겉만 익은 생쌀이었고 동태도 설익어 비린 냄새가 나는 것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나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그런데도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차차 숙련되면 되니까 너무 걱정 말라며 ‘그래서나 생동태국 맛을 보지 언제 먹어보겠는가’고 웃는 바람에 나도 따라 웃고 넘겼다. 의지 할 곳 없이 떠돌며 살던 나에게는 남편이 내 삶에 기둥이었고 가정은 우리 둘의 보금자리였다.
결혼 후 나는 맏딸 영희를 낳았다. 출산 전까지 일을 하며 얼마간의 산전(産前),산후(産後) 휴가비를 받아 먼 친척 되는 사람에게 아기 이불 만들 천과 목화 솜을 사달라고 주었더니 경마장에서 모두 날려버렸다. 금 같은 귀한 첫딸을 낳았어도 감싸안을 이불하나 변변히 없어 남편이 군대에서 입던 낡은 솜동복에 싸서 키웠다. 그 당시 북한에서는 직장 일을 하는 여성들에 한하여 70일간의 산전,산후 휴가를 주고 월급의 몇 프로를 휴가비로 주었다.
해산하자 남편이 휴가를 내어 궂은 일 마른 일 도맡아 하고 산후조리를 해주었다. 타향에서 가정을 이루고 태어난 첫 자식은 남편에게 있어서 더 없는 행복이었고 나와 딸을 위해 기울이는 수고가 고맙고 어머니 생각으로 눈물이 났다. 아이를 낳았을 때가 어머니 생각이 제일 간절한 것 같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해산 후 나는 직장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가정 일을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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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4

자백사업

1959년 1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중앙당 간부들을 선두로 정치대학 학생들의 그룹이 조직되어 모든 공장들과 인민반 주민들을 상대로 자백사업이 벌어졌다. 그들은 사람들을 아침 일찍부터 밤 12시까지 모아놓고
“자기 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죄도 아는 것이 있으면 솔직히 털어놓아라. 누가 무슨 죄를 지었으며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숨어 지내는지 우리는(당에서는)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솔직성을 믿고 참고 있으니 발리 자수하라. 이 기간에 솔직히 자수하면 당의 ”관대정책“으로 용서받을 수 있으나 숨기고 있으면 무자비한 법적 징벌이 가해질 것이다” 이렇게 위협공갈하며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자백사업기간 내 가슴은 바싹바싹 타 들어 재가 앉았다. 나는 59년 간 살면서 평양시 서성구역 서성리로 출생지를 위장하고 살아오다가 한국에 와서야 처음으로 태어난 곳을 떳떳이 밝혀 놓았다. 본적지가 밝혀지는 날에는 해방 후 김일성을 반대하여 투쟁하신 아버지에 대한 이력과 두 부모님의 월남사실이 발각되어 단란하고 화목한 우리 가족에게 걷잡을 수 없는, 멸족을 당할지도 모를 무서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집에 들어와 가슴을 치며 울었다. 자백사업으로 공장에 파견된 중앙당 간부가 찾아서 가보니 남조선에서 어떤 간첩임무를 받고 왔는지 솔직히 털어놓으라며 “숨기는 날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하며 위협하더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있다가 전쟁에 참가하여 피 흘리고 불구 된 죄밖에 없다고, 잡아가겠으면 잡아가라고 책상을 뒤집어놓고 뛰쳐나왔다는 것이었다.
집안에는 언제 불행이 들이닥칠지 모를 공포와 불안이 터질 듯이 가득 맴돌아 숨소리조차 마음놓고 크게 내 쉴 수가 없었다. 자백사업기간 잡혀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당의 말을 믿고 기만술에 속아 넘어서 숨기고 있던 과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가 그 당시는 용서받았어도 훗날 말 한마디, 행동 한번 잘못했다가 붙잡혀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성분이(가정내력) 좋은 사람들은 웬만한 잘못을 해도 관대히 용서받고 무사히 넘어가지만 성분이 나쁜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벌이 따르고 용서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무사히 넘어갔다. 안도감에 후~ 하고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하느님이 나를 도왔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을 그리워하며

수십 년이 흘러 얼마 안 있어 칠순을 바라보는 오늘도 동생 생각을 떠올릴 때면 눈물부터 나오고 그때 얻은 병으로 몸이 많이 아프다. 아니 육신의 병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1960년 어느 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던 동생 철이가 퇴거수속을 해서 나를 찾아왔다. 몰라볼 정도로 늠름해진 동생을 몇 년만에 만나고 보니 기쁘기도 하고 그 동안 남모르게 얼마나 마음 고생을 많이 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짜릿하니 저려오고 눈물부터 앞섰다.
남편은 하나밖에 없는 처남을 만난 것이 친형제를 만난 것 마냥 반가워하며 따뜻이 맞아주었다. 동생은 키가 크고 모습이 꼭 아버지를 빼어 닮아 잘 생긴 미남이었고 어릴 때부터 남달리 머리가 총명해 부모 없이 자랐어도 학교 단위원장을(학생회장) 하며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칭찬과 호감을 받았다. 이 세상 그 무엇이라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귀한 동생이 찾아왔지만 평양이 특별시로 제정되면서 거주하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과 한집에서 살아보려고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을 찾아 안타깝게 뛰어다녔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내무서에서 경리과장을 하는 먼 친척을 찾아가 사정을 말했더니 월남자 가족이라는 허물 때문에 선뜻 나서기를 꺼려하고 외면하였다.
당시 우리 집 살림 형편은 세 아이가 있고 남편 혼자서 벌어 하루 세끼 굶지나 않을 정도로 겨우 먹고 살아가는 처지여서 어린 나이에 고생만 하던 동생이 몇 년만에 누나네 집이라고 찾아왔지만 쌀밥은 고사하고 옥수수밥 한 끼 배불리 먹이지 못하였다. 동생도 미안한 마음에 먹는 밥이 목에 걸렸을 것이고 늘 배고팠을 것은 뻔하다.
좀처럼 쓰다 달다 표현을 하지 않는 성미인데 오죽했으면 하루는 나에게
“누나 강냉이 밥이라도 한번 배불리 실컷 먹어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돌을 삼켜도 소화시킬 한창 먹을 나이에 얼마나 배가 고프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아 혼자서 울고 또 울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의 소원을 풀어주고 싶었으나 가난한 살림에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평양에 거주를 해보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동생은 허기져서 평양 전승동에 있는 우의탑 밑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몇 시간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선 노인 내외분이 사는 집이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고마운 노인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내 동생을 가까이 있는 자기 집으로 업고 가서 미음을 쑤어 먹여 살려냈던 것이다.
다행히 위험은 면했으나 주머니에 있던 소지품과 퇴거 서류를 모두 잃어버려 평양에 거주하는 일을 포기해야 했다.
동생은 집에서 의학서적들을 빌려다 자습을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의학공부를 하려고 애썼다. 그러던 중 고마운 분을 만나 평양 모란 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바라던 소원이 뜻밖에 이루어져 너무 기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고 나도 더 이상 큰 기쁨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동생의 기쁨은 곧 내 기쁨이었고 우리 남매에게는 그 나이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했던 순간도 오래 가지 못했다. 숨기고 있던 동생의 거주지가 탈로나 학교에서 퇴학당하여 다시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대동군으로 내려갔다. 그 후 동생은 남의 집 윗방에서 하숙하며 근처에 있는 기계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그때 동생과의 이별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강냉이 밥이라도 한 번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던 동생의 소박한 소원이 누나에게 남긴 영원히 들어주지 못한 마지막 소원이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가슴속에 이 세상에 대한, 아니 우리 가족을 이 지경으로 만든 북한의 악인들에 대한 원한과 피눈물이 고이고 고여 나는 심장병이 들었고 지금도 동생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와 아프게 타 들어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으니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원한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때는 1962년 4월. ‘당에서는 핵심당원 동지들을 어렵고 힘든 농촌으로 부릅니다’는 낯간지러운 말로 성분이 걸리거나 저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제적으로 농촌으로 내보냈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4월 6일 평양시 력포구역 류현리 어느 농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남의 집 윗방에 부엌을 잇달아 짓고 살림을 풀어놓은 뒤 남편과 나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의 착한 마음씨를 곁에서 지내 본 집주인이 먼발치로 지나가는 70은 돼 보이는 영감을 가리키며 보위부 밀정인데 우리 집을 감시하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고 귓속말을 해 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영감은 별일도 없는데 때없이 우리 집에 찾아와 이말 저 말을 물어보기도 하고 울타리 밖에서 몰래 숨어 감시하다가는 사라지곤 하였다. 농촌으로 온 것만도 서러운데 감시까지 하다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어느 하루도 마음놓고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던 1962년 12월 젊은 청년 2명이 찾아와 자기들은 내 동생 철이 친구들이라고 하였다. 나는 동생의 소식을 듣게 되어 반가워 집으로 들어오라고 이끌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들이 전해준 동생의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청천벽력의 비통한 소식이었다. 재일 교포인 그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고장난 반도체 라디오를 수리하여 한국방송을 듣다가 철이를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하고 항상 감시해오던 안전원에게 걸려 방송을 듣던 5명이 모두 체포되었는데 모든 책임은 동생에게 씌워지고 자기들만 풀려났다며 죄스러운 마음 어쩔 줄 몰라하면서 용서해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5살에 부모님들과 생이별하고 그 모진 세월 속에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언젠가는 부모님을 만나게 될 그 날을 그리고 기다리며 살아보겠다고 꿈을 안고 몸부림치던 불쌍한 내 동생을 세상은 왜 이리도 모질게 짓밟는단 말인가. 나는 불쌍한 내 동생이 무슨 죄가 있어 잡아가느냐고 차라리 나를 잡아가고 동생을 내놓으라고 가슴을 치며 목놓아 통곡을 하였다. 남편도 이성을 잃고 헤매는 내 마음을 그 무엇으로서도 달랠 수 없었다. 그 때 정신적 충격으로 심한 신경쇠약과 착란증세를 일으키며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고 정신 없이 길가를 오가며 동생과 비슷한 사람을 보면 “철이야”하고 달려가 붙잡고 앞을 막고 서곤 하였다. 동생을 빼앗긴 나의 심정은 삶의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아 인생을 더 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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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5

사랑하는 내 동생을 그리워하며

동생이 체포된 후 보위부 밀정은 내놓고 우리 집을 감시하였다. 1964년 봄. 동생이 자강도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집안 일을 모두 제쳐놓고 동생 면회 갈 준비를 하였다. 동생이 감옥에서 먹을 수 있는 미숫가루와 사탕, 엿, 내의 등을 준비하였다. 차디찬 감방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니 하루 한 시가 급해서 서둘렀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산과 들에는 꽃이 한창 피는 봄철이었으나 독재자가 가져다 준 온갖 원한에 의해 내 가슴은 사정없이 찢기고 할퀴어져 피눈물로 얼룩졌고 꽁꽁 얼어든 차가운 고드름을 품은 마냥 살을 에이는 아픔으로 내 몸은 병들어 갔다.
서평양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강계 역에서 내려 사방을 바라보니 산들이 병풍 마냥 사방이 둘러 막혀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한동안을 서성거렸다.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교도소가 어디에 있는가 물었더니 산골짜기로 30리 가량을 더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소한 좁은 산골길을 따라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한참을 걸어서야 겨우 교도소에 이르렀다. 난생 처음 보는 어두컴컴하고 그 분위기만으로도 두려움을 주는 교도소 모습은 내 가슴을 서늘케 하였다. 길길이 높이 쌓인 콘크리트 장벽 위에 층층이 쳐놓은 가시 전기철조망과 사면에 구축돼 있는 포대들, 거기에 무장한 경비병들의 모습은 살벌한 교도소 분위기를 한층 더 돋아주었고 옛 역사책에 나오는 노예들의 성을 보는 것 같았으며 너무도 착하고 불쌍한 내 동생이 저 지옥이나 다름없는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대기실에서 면회 순서를 기다리며 천만가지 생각으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말을 건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였다. 자그마한 면회실 방에는 책상이 가운데 놓여 있고 면회 자들이 마주 앉게 되어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면회실에 들어간 나는 죄수들이 나오는 철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동생 모습이 언제 나타날까 초조하게 바라보며 기다렸다.
얼마 후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동생이 간수들에게 이끌려 나왔다. 그 늠름하고 멋졌던 모습은 간 곳 없고 핏기 한 점 없는 창백해진 얼굴과 너무나 허약해진 동생의 모습은 2년 남짓한 기간에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였음을 순간에 엿볼 수 있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으로 할 말을 잃은 나는 동생만 바라보고 서 있고 동생도 머리를 숙인 채 입술을 떼면 눈물이 쏟아져 나올까 봐 입술을 깨물고 서 있기만 하였다.
넋을 잃고 서 있는 나에게 간수가 면회 시간이 짧으니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라면서 동생이 간염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동생에게 “모두 잘 있으니 걱정말고 네 몸조리를 잘 해야한다. 그리고 생활을 잘해서 어서 빨리 나와야 한다”고 겨우 몇 마디를 더듬거렸다. 동생은 간수의 눈길을 피하여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이라고 쓰는 것이었다.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한두 해도 아닌 15년 세월을 이런 지옥 속에서 동생이 무사히 살아 나올 수 있다고 어떻게 기약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도 억울하고 분한 형벌이었다.
창백해지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동생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누나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부탁대로 잘 할거예요.” 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나는 더 마음이 아팠다.
‘저 불쌍하고 가엾은 내 동생 어찌한단 말인가. 차라리 내가 대신 감옥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차라리 통곡하며 누굴 원망하고 하소연이라도 했으면 지켜보는 내 마음이 이다지도 아프지 않을텐데...’
차디찬 감방에서 쇠약해진 동생의 손을 떨리는 눈길로 바라만 보아야 했다. 감옥의 규정에는 면회하는 과정에 손을 잡아보아서도 안되며 말을 함부로 하거나 울면 면회가 중지되고 죄수들에게 더한 고통이 가해진다고 한다. 두 달 후에 다시 면회를 오겠다고 약속하고 그 험악한 곳에 동생을 남겨둔 채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헤어졌다. 교도소가 멀리 보이는 숲 속에 털썩 주저앉아 참았던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하염없이 울어보았으나 쌓이고 쌓인 원한은 가실 길 없고 그럴수록 더더욱 가슴 깊이 쌓여만 갔다.
두 달 후. 나는 동생과의 약속대로 살림을 쪼개며 음식도 장만하고 집에서 키우던 개를 팔아 여비도 마련해 가지고 또 면회를 갔다. 첫 번에 면회 갔을 때보다는 동생의 몸이 조금 낳은 거 같기는 했어도 동생을 감옥에 두고 오는 아픔은 오히려 더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업고 갔던 세 살이었던 셋째 영숙이가 돌아오는 길에 열차 안에서 홍역에 전염되어 큰 곤경을 치렀다. 그 당시 장질부사, 파라티브스, 홍역 등 많은 전염병들이 그칠 새 없이 휩쓸곤 하였다.
한 번은 맏아들을 임신한지 7개월이 된 몸으로 면회를 갔었는데 자강도는 고산지대여서 눈이 오면 유난히도 많이 왔다. 무릎을 넘는 숫눈길을 헤치며 짐을 머리에 일고 동생을 찾아갔는데 평양시에 전염병이 돌아 평양시에서 온 사람들은 일체 면회를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음식과 옷만이라도 받아달라고 안타깝게 사정을 하였으나 안전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냉정하게 거절했다.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추운 겨울 속옷도 변변히 입지 못하고 냉방에서 떨고 있을 동생의 모습이 눈에 밟혀 도저히 돌아설 수가 없어 다시 한번 사정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허사였다. 어린 자식들도 변변히 못 먹이고 한술 두술 모아서 마련해온 음식과 한푼 두푼 모아 마련한 옷을 안고 왔다가 동생의 얼굴도 못 보고 돌아서자니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 속에 엎어져 이놈의 세상 빨리 뒤집혀지라고 저주하며 넋을 잃고 울었다. 이 한 많은 세상이 확 뒤집히면 내 동생도 감옥에서 나오고 부모님들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울었다. 하지만 차디찬 눈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치며 울어도 내 동생이 얼어죽던 병나서 죽던 상관이 없는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시련에 찬 가정생활 한 많은 세월은 덧없이 흘러 맏아들 정학이와 넷째 딸 영순이가 태어났고 우리 집은 농장 소재지인 류동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다. 나는 수년간 동생 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시름시름 앓던 끝에 심한 화병과 심장판막증이라는 병을 얻게 되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을 잃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 신세를 지곤 하였다. 이렇게 건강이 많이 나빠져 임신중인 아이를 남편과 상의하여 유산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 북한에서는 아이를 10명 이상 출산하면 모성영웅 칭호를 수여한다며 많은 출산을 장려하였고 낙태수술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법적으로 엄격히 통제하였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부부의 합의 하에 공민증(주민등록증)을 가지고 해당기관에 가서 서류에 합의조장을 찍어 후에 수술을 받을 수가 있었다.
남편은 나를 데리고 평양 적십자병원으로 찾아가서 수술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검진을 진행하던 의사가 나를 보더니 아들이 몇 명인가 물었다. 딸 4명에 아들 1명이라는 말을 듣더니 임신한 아이가 아들인데 될 수 있으면 치료를 받으며 낳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아들이라는 말에 남편도 아무 말을 못했고 나도 역시 선뜻 수술할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10개월을 10년 같이 느끼며 고생한 끝에 1970년 7월 4일 막내아들 정수를 출산했다. 아픈 엄마의 몸 속에서 자라난 정수는 영양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너무도 애처롭도록 허약했고 거기에 어려운 살림 때문에 해산 후 변변히 먹지 못하여 젖을 먹일 수 없었다.
해산 후 7일간 겨우 밥을 먹고 감자와 죽으로 끼니를 에워야 했다. 태어나 엄마의 젖을 한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핏덩이 같은 정수는 배가 고파 밤낮으로 울었다. 13살 난 맏딸 영희가 우는 동생을 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젖동냥을 하여 키웠다. 한밤중에도 배고파 우는 동생을 업고 동생들과 함께 젖동냥을 나갔다가 눈물자국이 난 얼굴에 겁에 질려 들어오기도 하고 젖동냥을 못하고 등에 업힌 동생과 함께 울며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가슴이 미여지고 어린 자식들이 가엾기 그지없었다.
나도 모르게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오롱조롱 나를 들러 쌓고 앉아 내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며 “엄마 죽지 말아. 눈뜨고 일어나”하며 슬피 우는 자식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면 불쌍한 이 어린 우리 아이들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일어나곤 하였다.
내가 늘 아픈 탓에 나이보다 먼저 철이 들고 마음이 성숙해진 세 딸 영희, 영실, 영숙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물도 길어오고 빨래, 청소, 석탄 주워 오는 일,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당연히 자기들의 몫으로 생각하였다.
어느 날 12살 난 영실이와 10살 난 영숙이가 아침에 죽 한 그릇을 먹고 집을 나간 뒤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한참동안을 찾아 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흙먼지 투성이가 된 두 딸이 울먹이며 집에 들어섰다. “웬일로 어디 갔다가 이제서야 왔니?”하고 묻는 말에 딸애들은 서럽게 울며 온종일 가을걷이한 밭을 헤매며 감자이삭 한 바구니를 겨우 주었는데 농장 분조장이라는 사람이 농장 밭에서 주운 것이라고 모조리 빼앗았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응석을 부리며 자라야할 철없는 나이에 집일을 돕겠다고 조그마한 손으로 손톱이 달토록 땅을 파헤치며 하루 종일을 밭에서 돌아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이 아파 아이들을 꼭 껴안고 “얘들아, 이제 아버지가 쌀을 타 가지고 오시면 밥을 지어줄 테니 다시는 감자이삭 주우려 다니지 말아”하고는 울고 말았다.

10. 남편을 살려야 한다.

1971년 1월 2일 설 명절. 우리 가정은 밤새 배가 아프다고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남편 때문에 걱정되고 불안하여 명절을 즐길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아침이 되자 친구네 집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며 입으로 분수처럼 피를 토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갑자기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놀라 “여보, 왜 그래요. 죽으면 안 돼요. 살아서 고향에 가셔야 돼요.”남편을 끌어안고 아우성을 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잠시 후에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의사들이 달려와 남편을 병원으로 후송했다. 남편은 군대생활을 하면서부터 위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이 악화되어 위궤양이 되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바로 수술을 받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얼굴은 하얘지고 뼈만 앙상하게 허약해져서 예전의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살려야 된다는 생각에 손목시계와 성한 내 옷가지들을 이웃들에게 부탁하여 모두 팔아 약을 지었다. 내가 그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기둥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던 남편이 있어 가능했던 것인데 이렇게 쓰러지고 보니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남의 젖을 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정수의 모습도 말이 아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젖을 얻어먹으려니 소화불량에 영양실조까지 걸려 살려낼 것 같지도 못했고 동생을 업고 동냥하는 어린 딸의 모습도 가슴아파 볼 수 없었다. 나는 생각 끝에 마음이 아파도 정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애육원(보육원)에 보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아 맏딸에게 말을 하였다.
내 말을 듣던 영희는 울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동생을 키우겠으니 애육원에는 보내지 말자고 하며 정수를 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후부터 영희는 학교에 못 가고 정수를 돌보았다.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갈 때도,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면회를 갈 때도 동생을 등에 업고 다녔고 14살부터 큰 이불도 혼자서 빨고 바느질도 혼자서 해냈다. 불우한 부모들의 맏자식으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자란 내 딸 영희. 엄마에게는 아픔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을 주고 동생들에게는 부모를 대신해 주었다.
몇 년간 집안에 닥쳐 온 풍상고초로 인해 동생과의 소식이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자강도 강계에 있던 동생이 평양시 승호구역에 있는 정치범 교도소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당시 교도소가 있는 승호구역은 평양시 외각이었고 그 곳에 가려면 같은 평양시라도 여행증이 있어야 했다.
1970년부터 북한에서는 자유왕래를 못하도록 막기 위한 수단으로 여행을 할 때는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도록 법을 내놓고 사람들의 발을 얽어맸다. 여행증을 한번 내려면 여행증 신청서에 본인이름, 생년월일, 사는 곳, 여행목적지, 여행목적 등을 상세히 밝혀 적어 인민반에서 신청하는 경우 인민반장, 동사무장, 담당 안전원, 시 안전부 이부(여행증 담당 부서)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하고 직장인들이 여행증을 발급 받으려면 신청서를 작성해 가지고 작업반장, 당 세포비서, 직장장, 노동지도원, 생산지도원, 기사장, 지배인, 담당 안전원의 승인을 받아 해당 시․군 안전부 이부를 걸친 후 본인도 모르게 담당 보위지도원의 승인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다 여행증 매수가 제한되어있어 웬만한 일로는 여행증 받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던 부모가 사망하였다는 전보가 와도 이와 같은 복잡한 절차를 밟느라 며칠이 걸리다 보니 부모님들이 떠나는 마지막 길도 지켜드릴 수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뵙고 자식의 효도를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또 죽기 전에 자식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가짜 사망 전보를 쳐서 만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인 경우 부모가 진짜로 사망되었다는 전보가 와도 여행증을 잘 내주지 않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배우 마냥 연기를 해야 한다.
이런 형편에서 정치범 교도소에 있는 동생에게 가겠다고 여행증을 신청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 승호구역에 있는 시멘트 공장의 높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저 멀리로 아득하니 바라보였다. 나는 그 곳을 바라보며 저쪽 어딘가에 내 동생이 있는 감옥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갈 수 없는 나를 책망하며 동생의 비참한 모습을 떠올리고 어느새 눈에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이렇게 소식이 끊어진 동생은 41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도록 그 생사여부를 알 수 없고 사무치도록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만이 그때의 일들을 죽도록 못 잊게 하고 점점 더 또렷한 아픈 기억의 상처로 남아있다. 북한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만 쇠사슬에 얽어매어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매인 채 무참히 인권을 유린당하며 짐승만도 못한 자유 없는 억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위 수술 후 건강이 몹시 허약해진 남편은 더 이상 농장 일을 할 수가 없어 영예군인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북한에서는 6.25 전쟁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은 사람들과 군복무 중 부상으로 불구가 된 사람들에게 “영예군인”(상의군인)이라는 명칭을 주고 영예군인증명서를 수여하고 그런 사람들이 일하는 공장이 따로 있다. 남편도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영예군인으로 되어있어 쉽게 공장수속을 하여 평양시 동대원구역 랭천동에 있는 영예군인공장에 들어갔다. 나도 그 덕분에 남편과 함께 같은 공장에 출근할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탈북자동지회 2003년 5~12월 회보[탈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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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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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남자 2005-11-26 16:07:30
    미친 세상이군..
    사람이 살기 정말 바쁜 세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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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수유 2005-12-30 02:04:02
    제 아버님이 평남 평원에서 47년도 월남을 하셨는데 두고온 부모님과 동생의 생각에 평생을 괴로워 하십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병약해지신 아버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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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현 ip1 2015-10-18 23:30:46
    정권을 쥐고 대대손손 왕질 해 먹겠다는 한 인간 김일성의 야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받고 죽게했는지 알수가 있습니다.
    그 손자, 김정은이는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더하는 것 같아서 한숨이 나옵니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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