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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정권, 침묵하면 더욱 오만해진다 - 정영
동지회 14 8161 2005-12-15 14:35:58
정영 북한인권국제대회 에세이공모 가작

2003년 8월,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나는 눈물이 왈칵 치밀어 비행기 난간을 부여잡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자유를 찾아 떠난 지 꼭 5년 만에 이룬 뜻에 대한 성취감일까?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 서러움 때문일까,

새 삶을 찾은 나는 과거를 잊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인생의 절반을 방황과 전체주의의 무미한 희생에 바친 나는 치욕스러웠던 북한생활을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어 일부러 바쁘게만 살았다. 편안하면 지난 감옥생활과 북녘에 있는 가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감을 찾아 동네신문과 벼룩시장광고를 뒤져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와 날품을 팔며 억척같이 살았다.

일은 힘들어도 자유가 있으니 좋다. 한국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은 북한을 탈출해 자유를 얻은 탈북자들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응변적으로 반증해주고 있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는 이런 사회가 바로 북한이 그토록 목 터지게 떠들던 이상사회가 아닌가, 자유를 가진 국민은 ‘한강의 기적’을 창조해 세계경제 10위의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자유가 없는 국민은 굶주림과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자유와 법의 관계이다. 자유는 개인에게 필요하고, 법은 국가가 필요로 한다. 국가가 개인에게 자유를 얼마나 보장하고, 법에 따라 자유를 규정해줄 때 인민이 살기 좋은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북한의 헌법은 사회주의 법이지만, 현실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수령 일인독재국가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사회주의 법을 걷어치우고 수령군주독재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의 북한법대로라면 북한에 살아있는 사람들 자체가 범법자다. 국가의 공급이 폐절된 상태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공기를 마시고 ‘고난의 행군’을 버티어 냈는가?

나는 대한민국의 풍요가 낳은 도덕적 문명과 법의 관대함을 보며 물질문명생활이 사람들의 도덕과 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국정착 2년째인 나는 가끔씩 자다가도 벌떡 깨어 나군 한다. 잊혀지지 않는 영혼들, 살기 위해 죽지 않게 모지름을 쓰던 그 영혼들이 영화화면처럼 떠오른다. 그 원인을 나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회의 상반되는 현실을 체험하면서 나는 남한사람들에게 내가 목격한 북한의 비참한 인간상을 들려주고 싶다. 내 이야기가 북한의 형제들에게 자유의 빛을 선사하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을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했으면 한다.

온 나라가 사람잡이 일색이었다

지금 북한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생계형범죄자’들이 감옥에서 고통과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들의 죄목은 특별한 게 아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국경을 넘었고, 농장 낟알을 훔쳐먹고 철창에 갇힌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어제 날 수령에게 충실했고, 순진하게 사회주의 정책을 따랐던 사람들이다.

“배고픈 것과는 타협을 못한다.”는 말은 김일성이 70년대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굳어졌던 ‘의식주’를 ‘식의주’로 고칠 때 생겨난 말이다. 그의 ‘고견(高見)’은 90년대 이르러 현실로 증명시켰다.

‘애국미 운동’과 ‘인민군원호미운동’으로 감량되던 식량은 94년 말(평양기준)에 이르러 완전히 끊기었다. 당국에서는 온 나라에 ‘고난의 행군’을 선포하고, 칡뿌리와 벼뿌리를 대용식품으로 먹으라고 주민들을 산으로 내몰았다. 산은 한두 해 사이로 모두 벌거벗고 칡뿌리마저 동이 났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김정일은 “인민군대에게 죽을 먹이라”고 지시했다. 봄철에 이르자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에우던 사람들이 무리로 죽어나기 시작했다. ‘꽃제비’들이 많이 모이는 역전대합실 보일러의 연탄재와 쓰레기더미에는 매일과 같이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주인 없는 시체를 거두는 교통안전원(순경)들도 얼굴을 찡그렸다. 죽은 시체를 찾아내 지나가는 자동차에 실어 ‘사체실’로 보내는 일이 그들이 하루 몫이었다. 운전사들은 ‘적재함에 시체를 실으면 부정 탄다’며 역전을 피해 다녔다.

주민들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94년에 “00가 죽었대……”라던 사람들의 입에서 97년에 이르러서는 “00가 아직 살았대?!”로 바뀌었다. 살아있는 그 자체가 기적으로 느낄 정도였다.

굶주린 사람들은 ‘앉아 죽느니, 싸우다 죽자’ 식의 생사판가름을 곳곳에서 벌렸다. 가마에 넣을 옥수수 한줌이 없어 농장밭에 뛰어들었던 사람, 고기 한 점 먹을 수 없어 농장 닭을 훔쳐먹은 사람들이 속속 감옥으로 끌려갔다.

곳곳에서 비인륜적인 행위도 잇달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내쫓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부모가 애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살인, 강도, 절도, 사기와 협잡이 잇따르고, 공장설비를 뜯어내고, 기계를 뜯어내 중국에 팔았다.

나라가 혼란상태가 이르자 안전부(훗날 보안서)에서 총소리를 울렸다. 어떤 사람은 동 10kg을 중국에 밀수했다는 죄, 어떤 사람은 소 한 마리를 잡아 먹었다는 죄, 어떤 사람은 변압기를 뜯었다는 죄목으로 말뚝에 묶여 세상을 떠나야 했다.

총소리는 평양에서도 났다. 97년에 ‘서관히가 간첩이다’고 하더니, 98년에는 ‘최룡해가 간첩이다’고 소문났다. 주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조그만 나라에 무슨 간첩과 반동이 이리 많은가”며 나라를 망친 김정일을 비난했다. 중앙과 지방에서 사람잡이, 감옥에서도 사람잡이, 온 나라가 사람잡이 일색이었다.

부엌에는 김치 반 그릇이 전부였다

자강도에 금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희천에 갔던 것은 1998년 3월경이었다. 한 주일 동안 청천강상류에 천막을 치고 강바닥을 뒤졌지만, 이미 그곳 사람들이 강바닥을 다 뒤져놓은 뒤여서 한 그램도 캐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와 가마를 열어보니, 과연 쌀은 한 알도 없었다. 여기저기 뒤지니, 물김치 반 그릇밖에 없었다. 집안에는 며칠째 낟알구경을 하지 못한 어머니가 누워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온 집안이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이제야 3월 ‘노란 봄철’인데, 들판에 풀이 나오려면 아직 한 달은 더 뻗쳐야 하는데 말이다.

김치 반 그릇을 가지고 집안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얼굴에 살이 빠져 깊은 주름만 고랑을 패고 있었다. 노력혁신자로 이름을 떨치던 10년 전 직장 ‘영예게시판’에서 났던 어머니 모습이 아니다.

자식이라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아버지를 관도 없이 땅에 묻고 엄마까지 밥 한끼 대접 못하는 게 자식이 옳은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가슴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중국이 돈 벌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옆집 친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나는 심양에서 중국공안에 체포되었다. 그때 잡히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지켜드리고 감옥에서 고생도 안 했을 것이다.

1년 6개월 동안 100구의 시체를 목격하다

중국 단둥(丹東)에서 신의주 도보위부집결소에 옮겨져 두 달 가량 감금됐던 나는 99년 겨울에 내가 살던 구성시 안전부(보안서) 구류장으로 호송되었다. “야, 옷 벗어” 처음부터 계호책임자(간수장)의 명령과 함께 간수 6명이 달려들었다. 조국반역자들은 처음부터 맛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교양과정이다.

간수 6명은 모두 20대의 젊은이들이다. 간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이려고 뭇매를 안기고, 구두발로 허벅지를 짓밟았다. 개처럼 질질 끌려 3호 감방에 들어서자, 순간 송장냄새와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굵직한 쇠창살 안에는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까딱하지 않고 앉아있는 죄수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백지장 같았다. 이것이 바로 구류장의 진풍경이었다.

간수들은 감방냄새가 더러워 마스크를 끼고 근무를 선다. 차가운 마루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24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하는 고통이란 말할 나위가 없다.

하루 일과는 ‘기상!’ 하는 간수의 아침구령소리와 함께 죄수들의 자리정돈으로 시작된다. 제일 먼저 정돈한 감방이 “선생님, 0호 감방 자리정돈 다 끝났습니다.”라는 보고한다. 마지막에 정돈보고를 하는 감방은 앉았다, 누웠다 하는 연습을 수십 번 반복해야 한다. 꼴찌감방은 통강냉이를 받아먹지 못한다.

감방에 죄수 숫자만큼 통강냉이가 배식된다. 낡은 알루미늄식기에 푹 퍼진 옥수수알은 보통 50알 가량, 너무 불어 한 알이 엄지 손톱만큼 했다. 죄수들의 자살행위를 방지한다고 숟가락은 대가리만 꺾어 그릇에 넣어주었다. 소금은 하나도 주지 않았다.

한 주일이 지나자 계호책임자가 죄수들을 한 사람씩 철창으로 불러내어, “대가리 들라!”고 얼굴을 살펴본다. 어떤 사람은 “합격”, 어떤 사람들은 “불합격”으로 갈라놓는다. 감식처벌이라는 것인데 감옥에 들어온 사람의 살을 빼기 위한 처벌과정이다. 살점이 있는 죄수들이 제대로 불지 않는다고 일단 살을 뺀 다음 조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수감됐던 일년 반 동안 감옥에서 약 100여명이 죽는 것을 보았다. 허약 걸려 죽은 사람, 병들어 죽는 사람, 매 맞아 죽는 사람으로 감옥은 그야말로 하나의 무덤이었다. 밖에도 사람들이 굶어 죽는데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국가가 돌봐줄 리 없다.

집에서는 아들이 감옥에 붙잡혔다고 면회 갈 엄두를 못 낸다. 면회오지 않는 사람들은 감옥 밥으로 두 달 가량 살다가 죽는다. 그나마 집에서 면회 오는 사람들은 살아서 나간다. 가족이 없는 죄수들은 병에 걸려도 보석으로 석방하지 않는다. 놔주면 또 도적질을 한다는 게 석방하지 않는 이유다. 갈 곳이 없으니 차라리 감옥에서 죽으라는 소리다. 감옥은 그야말로 “명(命) 긴 놈만 살아남는 곳”이었다.

간수들은 맥이 없어 쓰러져 있는 수감자들이 죽었는가를 수시로 검사한다. 철창에 가까이 다가가 “야, 저 새끼 숨이 있나 봐” 하고 동료죄수에게 지시한다. “숨이 멎었습니다”라고 하면 팔목과 관자놀이에 맥이 있는가를 다시 확인하고 감방 구석에 방치한다. 밤이 깊으면 그가 덮던 모포에 싸서 밖으로 내간다. 이렇게 나간 사람들이 한 주일에 평균 세 사람꼴이다.

감옥에서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100달러짜리 위조죄로 수감된 30대중반의 죄수는 병보석을 노리고, 저 가락을 통째로 삼켰으나, 수술을 받지 못해 죽었다. 대학생들이 바친 폐동을 중국에 빼돌리고 들어왔던 대학청년동맹(사로청) 비서는 사건이 드러나자 왼팔동맥을 이빨로 물어뜯어 피를 쏟고 요절했다. 피를 쏟는 그를 보며 간수들은 병원으로 후송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다음에야 그가 덮었던 모포에 싸서 어디인가 버렸다. 옥수수를 훔치고 들어왔다는 한 죄수는 “요즘 세상에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어차피 한번 죽긴 죽는 몸이지만 관도 없이 더럽게 죽는 게 한스럽다.”고 개탄했다.

감옥의 위생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변기에 고인 똥을 물로 씻지 못해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기가 없어 물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정전이 된 감방안에 석유등을 가운데 켜놓고 부스럭대는 감방에 기합을 안긴다.

어느 날, 면식을 하러 나갔던 한 죄수가 떡 두 개를 감추고 들어온 적 있었다. 간수가 몸을 뒤져 떡을 발견하자, 철창에 집어넣고 변기에 거꾸로 서게 했다. 변기에 거꾸로 섰던 죄수는 팔 힘이 모자라 머리를 그대로 똥에 틀어박았다. 그의 옷과 머리칼에는 온통 똥이 발려져 악취를 풍겼다. 기합이 끝나고 자리에 돌아온 그는 머리와 옷의 똥을 자기 몸의 온기로 말리었다. 그 악취 때문에 감방에서 비난과 멸시를 받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굶어 죽는 사람들도 봤지만, 사형수들이 죽는 것도 목격했다.

도 안전국 감옥은 지옥이었다

“조국반역사건”이 마무리 되지 못해 나는 2000년 겨울, 또다시 평안북도 도안전국 감방으로 끌려갔다. 지방 구류장보다는 먹는 것과 잠자리는 좀 나았다. 그러나 크고 높은 감옥은 죄수들의 기를 죽이고 위압을 주었다.

도안전국구류장은 모두 16개의 감방으로 되어있다. 남자 칸은 3호, 5호, 7호, 8호, 9호, 11호, 14호였고, 여자 감방은 1호, 4호, 10호, 13호 감방이다. 지방 감옥과는 달리 도 감옥에는 사형수 칸이 따로 있다. 남자는 2호와 4호에, 여자는 6호와 12호에 각각 감금하고 있다.

15호와 16호는 현직에서 위법행위를 했거나, 부정축재를 하다 체포된 안전원(경찰), 검사, 당 일꾼, 판사들이 감금된다. 이런 사람들은 독(獨)감방에 들어간다. 핵심계층으로 있던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오면 일반주민들과 같이 가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들이 뿜어내는 불만을 주민들이 들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도안전국은 도급기관에서 제기된 사건을 처리하고, 시 군안전부 구류장에서 사형시킬 대상들을 최종적으로 심의하고 처형하기 위한 곳이다.

북한에는 사형법조 외에 사형 법이 또 있다

북한 헌법을 보면 형법59조, 60조, 62조, 67조 등 공식 정해진 사형법조가 있다. 이 법조를 받은 죄수들은 재판을 받고 75일간의 상소기간을 받는다. 말이 상소기간이지 사형수들이 상소를 해도 가족 중에 힘(빽)이 없으면 들어주지 않는다. 가족 중에 항일빨치산 연고자나 비행사, 대남일꾼, 중앙당일꾼이 있으면 면제된다. 사형수들은 자기의 남은 75일 동안 어떻게 하나 살기 위해 초인간적으로 발악한다.

1차 상소하고 안되면 2차 상소하지만, 대부분 75일만에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형장으로 가기 전에 밥도 주지 않고, 감방 내 사형수들끼리 서로 때리게 하여 반(半)주검을 만든다. 그리고 수시로 교정을 준다.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는 고문실에 데리고 나가 간수들이 때린다. 죽기 전에 사형장에서 김정일과 정부를 욕하는 험담을 할 가봐 그런다.

사형수들은 김정일의 방침사건, 사회적으로 엄중한 사건에 연루되었을 경우, 즉결심판과 함께 재판장소에서 공개 처형된다. 그러나 방침사건이 아닌 사형수인경우, 75일 동안 상소 기일을 준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사형수들의 죽음에 대해 가장 민감하다. 만약 사형수들이 갇힌 2호 감방에서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귀를 강구고 듣는다. 만약 팔이 뒤로 묶여 자동차에 실려 나가면 그 사형수는 그날로 끝장이다. 어디서 죽이는지 알 수 없다. 듣기로는 병원에 가져다 실험용으로 쓴다고 하기도 하고, 바닷가에 버린다는 사람도 있고, 웅덩이에 묻어 버린다고 하기도 한다.

북한에는 사형법조 외에 따로 제정한 사형법조가 있다. 이른바 ‘비밀사형법조’다. 본래의 법전에는 없는데 반드시 죽여야 할 존재라고 생각되면 ‘부칙 49조’를 붙여 처리해 버린다.

예를 들어 전과자가 다시 감옥에 들어올 경우, ‘개준 성이 없다’는 이유로 49조 대상이 된다. 범죄건수가 여러 개인 죄수들인 경우, 여러 법조항을 하나로 묶어 ‘부칙49조’를 달아 처리한다. 중범자라야 중국밀수범죄자, 폐동 장사꾼 등이다.

사형 외에 감옥에서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대상은 죄는 약하나 출소돼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다. 이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무한정 감옥에 놔둔다. 멀쩡한 사람도 감옥에 나두면 3개월이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다. 그러나 숨이 질긴 죄수는 일년이 넘어도 잘 죽지 않는다. 그러면 감옥의 군의(옥내 의사)가 약물을 복용시켜 죽인다.

나도 감옥에서 고통을 참지 못해 단식, 쇠꼬챙이 먹기, 소금 등으로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지만,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2000년 봄, 나는 병보석으로 도안전국 감옥에서 석방됐다. 영문 모르게 불러나간 나는 ‘당의 관대정책에 의해 병보석방한다’는 담당형사의 석방결정서를 읽고, 서약서에 지장을 찍고 출옥했다. 석방된 이후 더 이상 머물러 있으면 다시 무시무시한 죽음의 굴로 끌려갈 것만 같아 항상 마음 졸이며 살았다. 몸이 회복된 다음 나는 중국으로 재(再)탈출하는데 성공했고, 꿈에도 그리던 자유대한으로 입국하는데도 성공했다.

나는 석방될 때 분명 하늘이 나를 도왔고, 또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북한의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았다. 나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분명 국제사회가 북한에 좀더 강도 높게 말을 해야 한다.

퍼주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강도에게 “좀 주겠으니, 다시는 강도질을 하지 말라”고 얼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받은 것을 다 먹은 강도가 또 강도질을 하지 않을지, 더 횡포를 부릴지 장담할 수 없지 않는가,

역사가 보여주듯이 침묵하면 더욱더 횡포를 부리고 오만해지는 것이 김정일이다. 북한주민들의 두 어깨를 압박하는 살인적인 법을 개정하고, 여행, 거주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사회구조적 시스템을 고치도록 이구동성으로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래서 나처럼 살아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특히 북한주민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민주주의가 보장된 남한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들의 절명에 찬 애원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귀에 들려온다면 남한정부도 북한인권에 대해 더는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2005년 11월 25일 정영

자료제공 : 데일리엔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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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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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2005-12-23 13:27:06
    아 참!
    뭐라고 말할 수 없네요.
    부디 건강하셔 천운에 보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많이 받으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미르 2005-12-27 18:24:12
    한국에서의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시기를 바랄께요.. 목숨 거시고 한국 오셨는데 바라던거 꼭 이루시길 빌겠습니다...
    화이팅하세요..!!!!!!!!!!!!!!!!!!!!!!!!!!!!!!!!!!!!!!!!!!!!!!!!!!!!!!!!!!!!!!!!!!!!!!!!!!!!!!!!!!!!!!!!!!!!!!!!!!!!
    새해에는 꼭 바라던것 이루시고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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