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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한류카페 펌]북한 난민과 중국 조선족 관계
조선족? 0 481 2005-05-07 17:15:54
[펌]북한 난민과 중국 조선족

북한 난민과 중국 조선족

장 수 현 (부산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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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중 5명이 부모 모두 사망한 고아. 나머지 한 명의 경우에도 모는 사망, 부는 다른 곳에 가서 행방을 알 수 없음. 가족 상황에 대해 물었을 때, 거의 예외 없이 고개를 떨구고 힘없는 표정을 지음. 그 가슴 속 상처를 건드리는 나는 뭔가? 그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애들의 상처를 헤집은 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 [현지조사 일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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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에 걸쳐 중국 북동부지방의 변경지역을 방문하여 그곳에 불법적으로 체류중인 북한 난민의 삶의 단편들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너무나 많은 중첩된 문제들을 안고 있었던 탓에 차라리 현실적이지 않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적당한 안일과 여유가 허락되고 약간은 지루하기까지 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안정된 삶의 방식에 익숙해진 나는, 그들의 삶의 고통이 가진 비극적 무게 앞에서 여러 차례 할 말을 잃었고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내 자신을 저주했다. 너무 처절한 이야기라서 듣는 사람이 오히려 무감각해지기조차 하는 그들의 삶을 정제되고 초연한 학문적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갑갑함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이 글은 극심한 식량난과 그로 인한 복합적인 문제들 때문에 중국 국경을 넘어 들어온 북한 난민의 삶을 조선족과의 관계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 집중적으로 숨어살고 있는 북한 난민들은, 같은 민족(일부는 친척)으로서 자신들과 말이 통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동정하리라 기대되는 조선족 동포들에게 우선적으로 의존한다. 중국 정부가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언제든지 체포되면 북한에 강제적으로 송환될 한계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북한 난민과 조선족 동포의 만남은 시작부터 비극성을 내포한다. 생존이라는 절대적인 명제 앞에서 양자는 단순한 물질적 도움에서부터 악의적인 착취와 여성의 인신매매성 결혼에 이르기까지, 동포애와 이기적 동기가 뒤섞인 복합적인 만남의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이 글은 바로 이와 같은 한계 상황에서의 만남이 가진 관계의 비극성에 대한 서술이다.
이 글은 몇 명의 동료학자와 함께 중국 동북지방 변경지대에서 실시한 두 차례의 짧은 현지조사(1999년 7월 26일 - 8월 5일, 12월 21일 - 31일)에서 수집한 인터뷰 및 관찰, 그리고 국내의 탈북난민과의 인터뷰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국에서의 현지조사 기간 동안 우리는 북한 난민 당사자들을 비롯하여 난민 구호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와 한국인 자원봉사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했고 이들을 통해 북한 난민의 삶과 그 딜레마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했다. 이 인터뷰 대상자들은 중국 정부와 북한 정부 모두로부터 체포와 처벌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이들의 신상이 밝혀질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논지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실들은 드러내지 않거나 실제와 다르게 기술했다.
그럼 먼저 북한 난민들이 처한 상황의 한계성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공포의 문화를 살펴보는 것으로 북한 난민과 조선족간의 왜곡된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한계 상황과 공포의 문화

1999년 여름에 인터뷰한 30대 중반의 한 탈북여성은 생존을 위해 북한 여러 곳을 다니며 이런저런 장사를 하다가 남편이 죽은 다음에 딸 하나만 데리고 국경을 넘어왔다. 국경지대에서 만난 한 조선족 남자의 소개로 한족 남자에게 팔려갔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과 살기가 힘들고 너무 더러운 생활환경이 싫어서 도망을 나왔다. 현재는 한 조선족 집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 그 집 부모가 자기 아들과 결혼해 주기를 바라지만, 북한에 있는 아들까지 데리고 와서 함께 사는 것은 안된다고 해서 결정을 못내리고 있었다. 이 탈북 여성은 언제든지 중국 공안원이나 인신매매범이 자신을 잡으러 올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밤잠을 편히 자지 못하고 있다고 그 고통을 호소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있으면 자다가 옥수수밭으로 뛰어 들어가 거기서 밤을 보낸다. 지나가는 차의 불빛만 봐도 놀라서 가슴이 쿵쾅거린다. 계속해서 이런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살기 때문에 조금만 놀라도 심장이 뛰는 병이 생겼다.
이 여성의 예에서 잘 드러나듯이 대부분의 북한 난민들은 공포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자신들이 북한사람임이 드러나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그 때문에 당하게 될 혹독한 처벌, 그리고 조국을 배반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후의 암담한 미래 등이 겹쳐서 이들이 공포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든다. 이런 심리상태는 쉽게 타인을 의심하게 만들고 원인 모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사람들의 순수한 동기까지도 때때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북한 난민들의 삶을 특징짓는 공포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이들을 바라보는 중국과 북한의 시각과 그 구체적인 조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정부는 자국 영토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북한 난민들을 아직까지 국제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난민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들에 대해 엄격한 통제와 처벌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북한 당국 역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자국의 경계를 벗어난 난민들을 위협하고 있고 북한으로 송환되거나 월경 현장에서 체포된 난민들에 대해 혹독한 처벌을 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에 숨어살고 있는 난민들에게는 “공포의 문화”(culture of terror)가 일반화되어 있다.
중국 정부는 자국 안에 불법적으로 거주하는 북한사람에게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든지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할 범법자로 간주된다. 실제 중국 정부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단속과 송환을 통해 난민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볼 때 북한 난민에 대한 중국 정부의 단속은 주기성을 띄고 있다. 한번 큰 단속의 파도가 지나고 나면 조금 잠잠해졌다가 또 다시 대규모의 단속에 나서는 패턴을 보여준다. 난민 구호활동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의 견해로는, 상부로부터 북한 난민을 철저히 단속하라는 지시가 없을 때 중국 경찰(公安)은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난민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더라도 대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특수한 상황이나 치안 문제 등과 관련하여 단속 강화령이 하달되면 본격적인 소탕에 나서서 실적을 올린다.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가 발각된 사람은 대개 오천 위안(약 7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하며, 체포된 난민을 뒷문으로 빼돌리는 데는 그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찰이다. 이 사실은 북한 난민의 존재가 중국 당국에게 중요한 수입원의 하나가 됨을 말해준다.
북한 난민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조선족 동포들의 경우에도 그 정신적, 물질적 부담은 적지 않다. 이들은 멀리는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정심, 가깝게는 친척간의 정 때문에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식량 등을 구하러 국경선을 넘어온 북한 난민들에 대해 일회적인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장기적으로 중국에 체류하면서 생존을 도모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불법 행위자로서 처벌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오천 위안 이상의 벌금은 이들에게 아주 큰 재정적 부담이다. 난민을 보호하는 조선족 동포에게 안겨지는 심적 스트레스가 이처럼 크기 때문에 근래에 들어서는 난민 구호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심지어 이전에 구호활동에 열심이던 교회 중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바꾼 곳도 생긴 것 같다.
북한 당국은 불법적으로 중국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을 조국에 대한 배신자로 규정하며 이들에 대해 아주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난민들이 중국 당국이 국경지대 여러 곳에 세워놓은 수용소를 거쳐 송환되면 이들은 다시 혜산, 청진 등에 설치된 집결소로 보내져 조사를 받게 된다. 이들에 대한 처벌은 “죄”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교회나 남한사람들과 접촉한 것이 드러나면 공개처형까지 받을 수 있다. 성인 남자들은 대개 강제노동형에 처해지는데, “노동단련”을 받는 기간은 “죄질”에 따라 달라진다. 이들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받는다. 아이들과 여자들에 대한 대우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이들은 열악한 수용시설에 갇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다가 각자가 속해 있는 동네의 치안 담당자가 데리러 오면 풀려난다. 교통사정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수용시설에서 보내면서 고통을 겪게 된다. 아이들은 체포되어 감금되었다가 다시 풀려날 때까지 끊임없는 폭력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된다. 국경경비대와 수용소, 그리고 보위부를 거치는 동안에 월경에 대한 대가로 구타를 당하며, 학교에 가서도 매를 맞고 사상투쟁을 당한다. 여자들의 경우에도 대개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경을 넘은 것으로 간주되어 쉽게 풀어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개별 사안에 따라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체포되었을 때 받게 되는 가혹한 처벌과 인간 이하의 취급이 난민들에게 끔찍한 경험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월경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된다는 점도 체포에 대한 공포심을 가중시킨다. 북한 내부의 상황이 현재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집을 비우더라도 친척집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가거나 장사하러 나간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약간의 돈을 구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조국을 배반한 것으로 취급되며 북한의 현체제가 유지되는 한 계속해서 감시와 주의의 대상이 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된다.
이들의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난민들이 끔찍한 처벌에 처해졌다는 소문이다. 언제 어떤 사람이 공개처형을 당했다, 어떤 탈북자는 끓는 물 속에 집어넣어 죽였다, 북한의 특무가 난민들이 숨어사는 곳에 와서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갔다, 하는 등등의 소문들이 난민들 사이에 많이 유포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난민들은 이런 소문을 듣고 그 정확성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실제로 있었던 일 혹은 그럴 가능성이 높은 일로 쉽게 받아들인다. 난민들은 북한 당국이 특히 기독교 선교에 관련된 사람들은 극형에 처한다고 알고 있는데, 중국으로 건너와서 교회나 기독교 선교단체를 비롯한 여러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이들이 느끼는 공포심은 더욱더 현실감을 가지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가위눌린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은 난민들을 위한 구호활동에 관여한 사람들(특히 조선족 동포)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선교단체 등의 지원하에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도 혹시 북한 당국으로부터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가까운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실제, 한 조선족의 안내로 산속에 있는 난민 은신처를 보러 갔을 때, 그 조선족이 북한 특무가 총을 들고 인근에 나타났었다는 연락을 받고 공포심으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 조사단이 목격한 바 있다.
공포의 문화는 난민들의 노출을 최소화시키는 폐쇄적인 사회적 공간에 난민들을 가두게 만든다. 바깥과의 접촉이 극도로 제약된 북한 난민들은 엄청나게 답답하고 억눌린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억압과 부자유의 무게는 그들에게 약간의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을 때 그들이 표시하는 감사와 열정을 보면 잘 드러난다.
내가 중국어를 가르쳐주면서 가까운 곳에서 관찰할 기회를 가졌던 한 무리의 북한 남자아이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한 선교단체가 도시 한가운데 마련한 은신처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국경을 넘어온 지 얼마 안되는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이들은 기근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질병, 그리고 거친 생활환경 때문에 온 몸에 난민의 표시를 달고 다닌다. 작은 키와 야윈 몸, 그리고 상처와 버짐 등으로 덮인 이들의 몸을 보면, 누구든지 난민임을 눈치챌 수 있다. 신고가 들어가면 경찰에서 나와 단속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보호처를 열고 있는 교회와 아이들이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이들을 바깥세상과 격리시켜 살게 한다. 한창 뛰어다닐 나이에 바깥세상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그래서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는 몇 차례 안되는 기회를 손꼽아 기다린다. 이발이나 목욕, 큰 경축일을 맞았을 때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외식, 그리고 일요일의 예배시간 등이 바로 그런 기회이다. 어느 날 내가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을 때, 아이들을 돌보는 아주머니가 오늘 외식을 시킬 테니 어디로 데리고 오라는 전도사의 말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그 순간 아이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터뜨리며, 나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해서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얼마 전까지 나이 많은 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시무룩해 있던 아이까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공연히 이 아이 저 아이를 건드렸다.
난민들은 공포의 문화 속에 살면서 경계와 조심을 생활화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자기 억제의 긴장으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는 틈새 공간이 마련될 때 난민들은 폭발적인 자기 표현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것을 1999년 성탄절 다음날 어느 교회가 난민들만을 위해 마련한 축하 예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성탄절은 중국 공안의 시선이 교회에 집중되는 날이기 때문에 이 교회는 12월 26일을 자기들이 보호하고 있는 난민들을 모아 따로 축하 예배를 드리는 날로 잡았다. 이 날 예배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13 가족을 비롯하여 이 교회와 다른 교회의 조선족 신자들, 몇 명의 악기 연주자까지 제법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정식 예배순서가 시작되기 전에 찬양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난민들에게 박수와 손동작을 섞는 찬양이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내 예상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나이든 사람들부터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힘을 다해 박수를 치면서, 손을 높이 쳐들면서, 찬송가를 쉴 새 없이 토해냈다. 휴식시간 동안에 전도사가 앞쪽 긴의자 몇 개를 치웠다. 신명이 난 사람들에게 춤을 추거나 다른 율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감정적으로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찬양이 이어졌고 여러 난민이 앞으로 나와 율동과 춤을 통해 자기 표현의 시간을 가졌다. 정식 예배 순서가 끝난 뒤에 다시 찬양 예배가 이어졌다. 여러 집에 분산되어 보호받고 있는 북한 아이들과 청년들이 집별로 나와 율동을 곁들인 찬양을 사람들에게 들려줬다. 준비된 순서가 끝난 뒤에는 가족 단위나 개인별로 앞에 나와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몇 사람에게서 약간의 머뭇거림을 감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 목청을 다해 노래를 불렀고 그걸로도 충분히 표현하기 힘든 내면의 소리는 율동으로 변했다. 몇 사람은 흐느낌과 눈물로 자기 감정에 충실했다. 눈물 어린 눈으로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난민들의 억압된 자아가 분출구를 통해 터져 나오는 해방의 함성을 들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예배시간은 그 동안 극도로 자기 표현을 자제해 왔던 난민들이 경계의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지 않으면서 마음껏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틈새가 된다. 이와 동시에, 그 시간은 공동운명체가 된 북한사람들끼리 만나 아픔의 고통과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서로 나누면서 이루기 힘든 꿈의 실현을 꿈꾸는 틈새가 된다.
지금까지 북한 난민들이 처해 있는 한계 상황을 살펴보면서 그로 인해 생긴 공포의 문화와 그 문화 속에서 억눌린 자아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난민들의 열망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면 이런 조건 속에서 이뤄지는 북한 난민과 조선족 동포간의 어긋난 만남에 대해 얘기해 보자. 북한 난민과 조선족 동포의 만남은 일시적인 도움의 제공에서부터 고용이나 혼인을 통한 좀더 장기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과 공포의 문화 때문에 양자의 만남은 여러 가지 왜곡과 굴절을 겪는다. 여기서는 몇 가지 대표적인 유형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꽃제비

대다수의 난민은 장기적인 체류보다는 당장 급한 식량이나 돈을 구하러 오는데, 이들은 중국 변경지대의 조선족 동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물건을 가져와서 식량이나 현금으로 바꿔 가기도 한다. 이들은 목적을 이루면 굶주린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북한 쪽으로 넘어갔다가 형편이 안좋아지면 다시 월경을 반복하게 된다. 변경지대의 여러 도시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꽃제비’들 대다수가 위의 경우에 해당한다.
꽃제비 중에는 부모를 모두 잃어 고향에 돌아갈 이유가 없거나 좀더 안정된 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장기 체류를 결심한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시적으로 중국에 머문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주로 남한사람을 대상으로 구걸을 하며 시장에서의 잔심부름을 하거나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 돈을 모은다. 자신들이 목표한 액수만큼 모이면 국경을 넘어가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전해준 뒤 다시 기회를 틈타 넘어온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조선족 동포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시장의 조선족 아주머니들 중에는 이들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시키고 그 대신 숙식과 약간의 보수를 주는 사람도 있다. 한 변경도시의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는 막 도강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아낌없이 주고 또 이들이 바깥에서 벌어오는 돈을 맡아준다. 조선족 택시 운전수 가운데는 아는 난민 아이를 보면 공짜로 차를 태워주는 사람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아이들을 때리고 감춰둔 돈을 빼앗는 조선족 패거리도 있다. 북한 꽃제비 아이들과 조선족 떠돌이 아이들이 항상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한 변경도시에서 여러 차례 만난 한 무리의 꽃제비들은 비슷한 연령의 떠돌이 조선족 아이들 보통 때는 아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한 종교단체의 자원봉사자에 따르면, 가끔 조선족 아이들이 도강한 지 얼마 안되는 어린 꽃제비를 때리거나 위협해서 집에 갖다주기 위해 감춰둔 돈을 빼앗는 일이 발생한다. 조금 큰 꽃제비들은 이 일을 알고도 모른 체한다. 꽃제비들은 스스로의 불법적이고 불안정한 신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무모함을 잘 안다. 몸싸움에서는 이길 수도 있겠지만 언제든 공안에게 신고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회피나 소극적인 반항일 뿐이다.

고용과 착취

북한 난민과 조선족 동포간의 갈등은, 조선족 고용주가 불법 체류자라는 난민의 약점을 악용하여 이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아이들과 달리, 성인 난민들이 구걸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성인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은 아예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들 대부분이 전문적인 기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개 일시적인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남자들의 경우,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산간이나 농촌지역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잇는 사람이 많다. 탄광, 채석장, 임업장, 양돈장 등처럼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들고 더러운 일이 대부분이다. 또 최근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농촌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특히 농번기 때 난민들을 일꾼으로 쓰는 집이 많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기름집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거나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많으며 노래방을 비롯한 유흥업소 종업원까지 있다고 한다.
이들 난민을 고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족 동포이다. 난민들이 조선족 동포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은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이유 외에도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더 잘 이해하고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양자의 관계에서 임금이나 대우와 관련된 갈등이 아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남한의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난민들 역시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열심히 고용주를 위해 일해주고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분이 드러나 공안에 붙잡혀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따라서 고용주가 임금의 지급을 미룰 때 그것을 받기 위해 기다리기가 힘든 처지이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임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들의 이런 약점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고용주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은 정당한 보수를 지급받지 못하더라도 법에 호소할 수 없다.
간혹 좋은 고용주를 만나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난민들은 일반적인 기준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일을 한다. 난민들은 처음에는 조선족 동포들이 자신들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같은 일을 하면서 조선족이나 한족에 비해 훨씬 적은 돈을 받는다는 점이 이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다. 이런 상처는 고용주와의 인간적인 관계에서 충돌이 생길 때 더욱 깊어진다. 이들은 자신들이 못살고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무시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조선족 동포들의 여유있는 생활과 자신들이 받는 차별적 대우를 대조시키면서 적대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한 교회에서 난민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면서 약간의 보수를 받는 한 북한 할머니는 난민들의 이와 같은 정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친척들끼리 말하는 게, “중국사람들 자기 애 하루 저녁에 공부 한 시간씩 시키는 데 50 위안씩 든다, 억만장자라도 이렇게 하지 못하겠다” 이런 소리가 들리고, “그 전에 그렇게 못살던 게 지금 저렇게 잘 사니까 자기네 친척을 적대시한다”고 말하지요. 전도원의 입장은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불쌍한 북한사람들 도와주지, 자기 친척들은 못 도와준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야, 저 사람 진짜 하나님 종이구나” 이렇게 생각되다가도 어떤 때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집에 [아이 하나를] 넣을 때는 500 위안을 준단 말입니다. 그러나 내 집에 넣을 때는 [그보다 훨씬 적은 돈을 줍니다.] 그때 난 믿음도 없고 내가 하던 방식 그대로 하니까, 난 또 이기[주의]지 뭐. “너네 저쪽에 주겠으면 주고 싫으면 갈 데로 가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난민들의 이와 같은 주장을 조선족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북한 난민들이 낮은 임금을 받는 이유가 난민들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난민을 구호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는 한 조선족 아주머니(농촌교회 집사)의 말로는, 북한 난민들은 중국사람만큼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솜씨도 떨어진다. 그것은 난민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과거 중국사람들이 집체경제의 체제하에서 노동에 대한 열성을 가지지 못했고 일의 질을 중요시하지 않았듯이 북한사람들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혼자 열심히 일해서 더 얻을 수 있는 것이 적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일을 시작해서 일찍 일을 마치고, 일할 때도 건성건성 한다. 농사일을 같이 해보면 알지만 난민들은 중국사람이 하는 일의 채 반도 따라하지 못한다.
이처럼 난민과 조선족 동포는 난민의 노동력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미묘한 차별적 시각이 포함된 아주 확연히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한계적인 상황이 안겨주는 여러 가지 부담과 심리적 불안감 등이 이런 견해차와 결합될 때 양자간에는 치유하기 힘든 감정적 대립이 암암리에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이들은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구호와 이용

현재 변경지대에는 북한 난민들에게 보호처와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종교단체가 상당수 존재한다. 남한이나 미국 등지에서 들어와 선교를 겸한 난민 구호사업을 벌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실질적인 구호 활동은 대부분 조선족 동포의 손을 거쳐 이뤄진다.
아마도, 비교적 장기적으로 체류하는 북한 난민들이 중국 속에서 그나마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데는 조선족 교회를 비롯한 여러 선교단체들의 조선족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외국에 있는 선교단체의 재정적 지원과 신도들의 성금을 가지고 이들은 오갈 데 없는 난민들에게 약간의 돈을 보태주거나 숙식과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북한 난민들은 이런 구호의 손길에 대해 고마워하지만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떠도는 얘기들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그런 얘기들에 근거를 두고 교회와 조선족 동포들의 동기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외국의 선교단체들로부터 난민 보호와 선교를 내세워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뒤 그것을 난민들을 위해 충분히 쓰지 않고 몰래 착복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억측은 아니다. 사실상 조선족 동포 중에는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런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난민들은 종종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재정적․물질적 지원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구호활동에 관여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그리고 종교단체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북한 난민까지)은 난민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공안국에 의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난민들은 자신들에게 물질적 지원이 적다고 불평을 터뜨리며 때로는 집단적으로 소란을 피우기까지 해서 구호 사업 전체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 교회 전도사는 사실 교회의 재정상 현재 수준의 구호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이미 무리한 일인데 난민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하면서, 차라리 난민들이 공안국에 붙잡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내심을 토로했다. 자신들이 어려운 조건에서 힘들게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너무 몰라주기 때문에 신앙의 힘과 의무감이 없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난민들이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이들이 북한의 배급체제하에서 공짜로 모든 것을 받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고 조선족들은 해석한다. 이것은 자신들도 개혁 실시 이전에 이미 익히 경험한 바이다. 사회체계에 의해 받는 것이 몸에 익고 나면 아무리 고마운 도움도 당연히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민에 대한 구호활동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와 같은 상호 비판은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한계 상황 속에서 양자가 모두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감사할 줄 모르는 태도를 단순히 체제의 탓으로 돌리거나, 난민이 잡혀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구호활동 종사자의 내면 고백을 이중성으로 읽어내는 것은 이들이 처해 있는 어려운 조건과 공포의 문화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의 한계성은 이들로 하여금 오해와 자기 정당화의 함정에 쉽게 빠지게 만든다.


난민 여성과 인신매매

국경을 넘어오는 북한 여자들은 대개 자의든 타의든 중국의 조선족이나 한족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여자들의 경우 중국사회에 적응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혼인이라 생각되며 이 점은 많은 난민 여성 당사자들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혼인이 이뤄지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불교운동본부 1998, 1999). 첫째는 조선족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순수한 동기에서 여성의 정착을 돕기 위해 아는 사람에게 중매를 서는 방식인데, 현실적으로 이에 해당하는 사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둘째, 어떤 경우에는 변경지대 조선족 동포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여자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도움을 주면서 혼인 이외의 다른 생존방식이 없다는 점을 설득시켜 결혼에 동의하게 만든다. 이들은 남자쪽으로부터 여자를 소개해 준 대가로 상당히 많은 돈을 받는다. “사례비” 액수는 여성의 나이와 인물에 따라, 몇 천 위안에서 만 위안 이상까지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셋째로, 전문적인 중매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북한에까지 가서 여자를 데려오며 중국쪽 소개자에게 수수료를 받고 넘긴다. 이 소개자는 여자를 자기 집에서 보호하고 있다가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돈을 받고 넘겨준다. 넷째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적인 힘과 위협을 사용하여 여자를 팔아 넘기는 인신매매범이 있다. 이들은 난민들이 많이 넘어오는 지점을 지키고 있다가 여자를 발견하면 이들을 속이거나 강제력을 사용해서 남자에게 팔아 넘긴다. 어떤 때는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더 좋은 상대를 소개해 주겠다고 속이거나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반강제로 끌고 와서 다른 곳에 팔아 넘긴다. 최근에는 이런 방식의 인신매매가 점점 조직화되고 있다는 것이 현지 활동가들의 판단이다.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상당히 많은 인신매매 사례들이 조선족 동포들이나 난민 여성 당사자들에 의해 인신매매로조차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지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조선족 동포 중에는 중국 정부가 인신매매로 규정하고 있는 이런 현상이 사실은 난민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한 일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이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고 조선족 동포들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도록 도와줄 뿐이라고 했다.
난민 여성 자신들 중에서도 자신들의 불행한 결혼에 대해 강한 불만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준 조선족 동포에 대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한계적 상황 속에서 난민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신매매의 대상이 된 적이 있는 아주 지적 수준이 높은 한 여성은, 자신이 국경을 넘었을 때 만난 조선족 동포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중국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수밖에 없다고 권유한 것, 그리고 한족 남자 집에 자기를 데려다 주고 잘 살라고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을 기억하며 아직도 고마워했다. 소개비로 돈을 받아 챙겼다는 사실을 안 다음에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는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남편과 위생 관념이 약한 한족의 생활습관이 싫어 불만스럽게 살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 더 좋은 상대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것마저 자기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사례는 북한 난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현재의 인신매매가 상당한 정도 한계 상황 속에서 이들이 갖는 특수한 심리 상태 위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많은 난민 여성들이 정상적인 조건하에서는 결혼하기 힘든 조선족 혹은 한족 남자들과 결혼하며 그 때문에 엄청나게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돈을 주고 배우자를 구하는 남자들 가운데는 신체 장애자나 정신 지체자, 도박꾼, 술주정뱅이, 성격 파탄자, 변태 성욕자 등처럼 일반적으로 배우자감으로 적당치 못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과 결혼한 여자들은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한다. 많은 경우, 시집 식구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을 뿐 아니라 때로는 감금된 상태로 지내기도 한다. 매를 맞거나 성적인 모욕을 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결혼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을 가는 여자들이 많이 생긴다. 이 현상은 또 조선족사회에 북한 난민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 즉 사기 결혼을 한 뒤 돈을 가지고 도망가는 여자라고 하는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마침말

중국 변경지대의 북한 난민과 조선족 동포의 관계는 그들이 처해 있는 한계 상황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공포의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한계 상황은 특수한 심리를 형성하며 그것은 다시 특정한 행위유형을 만들어낸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난민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난민과 조선족간의 관계의 문제는 앞으로 전개될 남북한 국민들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예상할 수 있게 해 준다. 남은 과제는 통일과 함께 본격적으로 발생할 이질성과 차별의 정치학과 관련하여 이런 관찰들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을 어떤 식으로 반영할 수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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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실 2005-05-08 16:22:54
    결국 이 모든 것은 미국 때문이네요. 미국은 위험스러운 도박을 하고 있다.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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