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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탈북자들에게서...
Korea, Republic o 림일작가 1 352 2012-09-03 07:36:13

특별대담 “4년 후 탈북자들에게서 ‘정말 수고했다’는 말을 꼭 듣겠다.”

조명철 의원은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한국으로 왔다.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 4년을 졸업하고 1987년부터 경제학부 교원으로 재직했다. 조 의원은 북한의 고위층 자녀들이 다니는 남산중고등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다. 김정일이 그의 동문이다.

조 의원은 북한에서 출신은 물론 집안 환경 등이 좋은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남한으로 넘어와 1994년 이후 지난해 통일교육원장에 이르기까지 정부 산하 연구소에서 북한과 동북아 부문을 중심으로 연구자의 길을 걸어왔다. 남한에서 생활한 시간은 17년이다.

조 의원이 맡고 있는 국회 상임위는 외교통상통일위원회와 정보위원회다. 5월 말 국회가 문을 연 이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 개정 법률안(조명철 의원 등 10인)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조명철 의원 등 10인) △노인복지법 일부 개정 법률안(조명철 의원 등 10인) 등을 발의했다.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신관에서 조명철 의원을 만났다.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한다. 탈북자 출신 첫 국회의원인 만큼 의원님에 대한 탈북자들의 기대가 크다.

정말 고맙다. 새누리당과 국민이 나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티끌만한 의심의 여지도 없다. 이는 우리 2만4000여 탈북자에게 준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조금이라도 망각하면 나는 국회의원이나 탈북자의 자격이 없다.

-2만4000명은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다. 어떻게 보는가.

숫자는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다르다. 2만4000의 탈북자, 분명한 것은 이들 모두가 북한 정권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나같이 평양에서 부유하게 살았건, 함경도 오지에서 가난하게 살았건 이 땅에 오면 모두 꼭 같은 동지들이고 우리는 하나다.

-자천타천 탈북자들의 리더가 됐다. 실감하나?

어깨가 무겁다. 리더의 자격은 출생과 환경, 교육과 인성 등 서로 다른 대중을 모두 품는 훌륭함에 있다.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부족하나마 자신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궁금하다.

1959년 4월 2일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에서 부친 조철준, 모친 강하옥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무원(내각) 건설부장(건설부장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인민경제대학(행정 간부 양성기관) 통계학 교수였다.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 달라.

충북 보은 태생인 아버지는 1933년(왜정 시기) 만주로 가던 중 청진에 정착했다. 김일성종합대학 개교(1946년) 이듬해에 시험을 봐서 입학했고 다음해 소련 레닌그라드 건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전후 귀국해서 평양의 웅장한 건축물 시공에 열정을 바쳤다. 그 증거물이 개선문 옆의 ‘국가계획위원회청사’와 노동신문사 옆의 ‘평양예술극장’이다. 어머니는 함북 회령 태생이다. 요즘말로 하면 남남북녀 커플이다.

-평양에서 다닌 남산학교는 어떤 곳인가.

김정일과 그 형제들이 다닌 특수학교다. 정확한 위치는 노동당 1호 청사라고 부르는 옛 김정일 집무실 맞은편에 있었다. 교육과목은 일반학교와 엇비슷한데 학교의 시설이나 교육설비는 최고의 제품들이었다. 모두 비싼 외화를 들여 외국에서 특수 주문해온 시설들로 호화스러운 사치품에 가깝다.

-김평일, 김영일과는 가까운 사이였나.

아니다. 내가 인민반 1학년 때 김영일은 3학년, 김평일이 중등반 2학년이었다. 남산학교는 유치원 교육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까지 모두 있다. 이유는 김정일 가문의 생활수준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6개월에 한 번씩 전체 학생들에 대한 신체검사를 진행하는데, 이것은 수령 아들들의 건강을 위해서였다.

-김정일의 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면 자긍심도 있었을 것 같다.

깊이 생각해보면 허황한 것이 더 많았다. 우리는 김정일의 동생들인 김평일과 김영일을 위한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교육과 생활은 그 두 사람에 맞춰 진행된다. 남산학교를 다니며 ‘독재자의 특권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국회의원 취임 전 학력 파동이 있었다. 섭섭한가.

그렇지 않다. 이번 일을 계기로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솔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절대 공감한다. 남한은 투명한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확인 불가능한 북한의 과거를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심을 속이는 일이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제를 자세히 알려 달라.

북한의 학제는 이렇다. 조교원, 교원, 상급교원, 2급 교원, 1급 교원이 있다. 남한은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다.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 4년 졸업하고 1987년부터 가졌던 직함이 경제학부 교원이다. 그리고 준박사였다. 그때 정보당국은 난처했다. 남한의 학제와 달랐기 때문이다.

-정부가 인정한 학력을 위조라니 기가 막혔겠다.

그렇다. 남북이 서로 다른 학제체제에서 생긴 해프닝이다. 당시 정보당국이 ‘북한의 대학교원과 준박사는 남한의 교수와 박사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 경력으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통일교육원장 자리까지 열심히 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오늘까지 국가는 물론 어떤 개인을 상대로도 단 한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1992년 8월 중국 난카이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교환교수 맞나.

북한에서는 대학교원을 외국에 내보낼 때 ‘외국실습’이라고 한다. 그 대학에 가서 자유롭게 강의하고 듣고 연구한다. 남한에서는 이런 경우를 교환교수라고 한다. 당시 정보당국은 ‘김일성종합대학 상급교원이며 준박사인 조명철이 중국 난카이대학 외국실습 중 한국으로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국민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며 고민했다.

-즐거운 추억도 되겠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십분 이해가 간다. 당시까지 만도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외국실습 중 내가 처음 왔으니 말이다. 어차피 이번 학력 파동이 잘 된 일이었다고 본다. 남북 간의 서로 다른 학제 체제를 전 국민이 조금이나마 알았으니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통일 예행연습이라고 본다.

-1994년 7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동기가 뭔가.

실은 평양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 정권에 실망했다. 군주시대도 아닌 현대사회에 와서 아버지와 아들이 공동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모든 인민들이 유치원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김일성 학습을 하며 살고 있다. 제 나라 제 땅도 마음대로 못 다니는 세계 유일의 불쌍한 국민들이 북한 동포들이다. 이것이 싫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말해 달라.

우리 집과 가까운 이웃에 살던 내각 재정 담당 부총리(기획재정부장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훗날 알게 된 이유는 1982년 평양 시내 주체사상탑, 개선문 등 김일성 우상화 건축물 시공에 많이 드는 예산에 불평을 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대노해서 그와 가족을 모두 요덕수용소에 보냈다. 그를 확인한 사람이 탈북자 안혁이다. 당시 나는 북한에서는 정치적 발언이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느꼈다.

-김일성 사망 10일 뒤 단행된 한국 망명이 묘하다.

중국에서 지켜본 10일 간의 김일성 장례는 나의 머리를 가로 젓게 했다. 배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시켜 애도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그 내막을 잘 안다. 김정일 정권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확신했다.

-북한에서 유명 탈북자들의 가족은 놔둔다는 말이 있다.

그럴 수도 있다. 당시 평양에서 나의 탈출을 비밀에 붙였다고 한다. 다른 대학도 아닌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민족 반역자’가 생겼다면 교직원들은 물론 사회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흥미 있는 자료를 보았다. 평양의 내 가족이 그대로 있으며, 당시 5살이었던 아들이 곧 나의 뒤를 이어 중국으로 유학을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북한의 대남기관에서 쓰는 일종의 심리전이라고 본다.

-탈북자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남은 가족에 대한 아픔 어떻게 극복했나.

한마디로 일에 미쳐서 잊었다. 가끔 직장에서 주말과 휴일도 일을 했다. 남들 보기에 일에 미친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나의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든 탈북자들과 같이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사랑하고 미안한 평양의 가족들이 있다.

-종교는 있는가? 있으면 갖게 된 이유는 뭔가.

개신교에 나간다.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개신교를 찾았다.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고 역설하는 종교는 내가 오늘까지 오는 데에 큰 버팀목이 됐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동토의 땅 저 북한에도 복음이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이 민족의 아픔을 끝내 달라고, 이 땅을 하나님이 오래도록 보호해 달라고…….

-취미나 여가생활은 뭔가.

등산이다. 돈이 들지 않기에 너무 좋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산 정상에 올라 일상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깨끗이 날려버리는 것이 이제는 몸에 배었다. 등산은 정말 공짜로 먹는 보약이라는 것을 느낀다. 인왕산, 북한산, 도봉산 등으로 한 달에 5~6회는 꼭 간다.

-좋아하는 음식은.

물냉면이다. 내 고향의 향토음식이다. 솔직히 ‘냉면 마니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양에서 먹었던 옥류관 냉면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흉내를 내는 장안의 평양냉면집을 자주 찾는다. 고향의 향수가 그리운 이유도 있다.

-가장 먼저 하려는 입법 활동은 뭔가.

북한인권법 제정이다. 미국이 2004년, 일본이 2006년에 공포한 북한인권법을 우리는 2005년 8월에 법안을 발의했으나 지금도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한심한 상태다. 북한주민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김정은에게 한마디 한다면.

불쌍한 인민들 굶기지 말라. 그들도 당신과 꼭 같은 사람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써먹었던 시대의 낡은 통치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자본주의식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라. 인민이 있고서야 당신도 있는 것이 아닌가? 제발 이성을 찾아 인민들의 배고픔과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를 바란다.

-탈북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나와 여러분이 찾아온 이곳 대한민국은 우리의 진정한 조국이다. 먼 훗날 후대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오늘의 하루하루를 값지게 살자. 4년 후 임기를 마칠 때 많은 탈북자들에게서 ‘정말 수고했다’는 말을 꼭 듣겠다.

대담=림일 작가 / 통일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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