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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인 (사료)에 의한 북한역사].. 왕청문 사건.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8 2021-02-11 03:07:24
●  김일성(  金日成  ) = 김성주(金成柱)가 나오는 기록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조직) 에 관한 件(건) (1930년 3월) : 《 역사적 사료(자료) 》 "독립운동사 제5권 : 남만의 독립전선" 



  ◇  왕청문 사건




< 앞으로는 편의상 한자는 한글로 해석해서 작성하고 한자는 빼겠다. > 



●   남만의 독립전선


일제가 만주평야를 전면적으로 침공하던 1931년까지에 그곳에서 항일무력투쟁의 지휘봉은 차츰 좌경 청년들에게 넘겨져 가는 경향이 짙어졌다.

만주에서 민족진영의 최후적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민부"는 "정의부"의 후신격으로서 
내외의 불리한 여건 밑에서 이중 삼중의 적을 상대로 고전 중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국민부'의 혁명적 전위 기관으로 조직 된 "조선혁명군"의 "양세봉(梁世奉)"·양기하(梁基瑕)·고이허(高而虛)[원명 : 최용성(崔容成)] 등 열사가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사실은 민족진영의 수미를 장식한 것이었다.

9·18사변 후로는 민족진영이 어디를 가든지 좌경 세력에게 말려드는 일이 많았다. 특히 침략 일제와의 혈전장인 만주 황야에서의 항일전선이 그러하였다.

일찌기 독립운동자들은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좌-우 합작의 필요를 부르짖어 어느 시기에는 이 문제를 행동에 옮겨 보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지난날 "신민부"·'정의부'가 그러하였고 '국민부'가 역시 그러하였다. 

만주에서 민족진영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활기를 띠려 할 무렵 "화요회"의 '김찬(金燦)'이 '신민부'에 대한 공작 책임을 맡았었고, "서울파"의 신일용(辛日鎔)은 '정의부'에 대한 책임을 맡고 대 일제 공동 투쟁을 전개하려고 좌우 양 진영의 인원을 조종하였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족끼리 유혈의 참극까지 번복하다가 만주사변을 당한 것이었다. 

돌이켜볼 때에 이땅에서 독립 전쟁 초기에 청산리·봉오동 전투 등 명실이 상부한 혈전을 전개할 시기에는 모두 소아를 버리고 대아관에 입각하여 사상의 좌우 싸움도 없었고 지방벌적 감정도 적었는데 "재만 군소 독립 운동" 단체가 대개 통합되어 3부(신민·정의·참의부)가 정립되면서부터는 각 기관 내부에서 사상적 대립, 타기해야 할 지방벌적 감정으로 자상천답 을 번복하여 적에게 어부지리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는 실정이었다. 

만주에서의 3·1 운동 후 치열하였던 무력 항쟁이 한고비를 넘고 민족진영의 대표적 기관인 '신민부'·'정의부'·'참의부'가 정립되면서부터는 이들 독립 운동 기관이 일본제국주의와 싸워서 힘을 소모하는 비중보다 공산주의 대책으로 소모하는 비중이 훨씬 컸었다. 

즉 타도 일본제국주의란 본래의 기본 사명을 망각하고 모든 힘을 대공 투쟁에만 소모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1930년 8월 8일 국민부 근거지인 왕청문(汪淸門)에서 조선혁명당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국민부'의 적극 옹호, 혁명 군대 개편 기타 사항을 결의하였으며 이에 계속하여
조선혁명당 대표 회의를 개최하고 전기 위원회의 결의에 대하여 다시 토의한 결과 "현익철(玄益哲)"·'양세봉(梁世奉)' ·고이허(高而虛)·김문학(金文學)·양하산(梁荷山) 등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위원회에 있어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강조하고 

고할신(高豁信)·김석하(金錫夏)·이진탁(李振卓)·이웅(李雄)·현정경(玄正卿)·이동림·이문청(李文靑)·이성경(李成卿) 등은 이를 절대 반대하여 말하기를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은 이미 민중을 이탈한 기관이므로 단호히 이를 해체하고 군대는 다시 편성하며, 농임은 농민 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 하였고, 이론 투쟁을 위하여 마침내 '현익철' 계의 순 국민부 지지파와, 현정경·고할신 등의 '반 국민부파' 와의 최후의 분열을 보게 되었다.

이무렵 '반 국민부파'는 즉시 밀의하고 '국민부' 타도의 계획을 정하여 혁명군 중 '반국민부 계'의 군인으로서 '국민부' 간부의 암살을 명하며 일면 국민부 지반의 파괴를 획책하고 그 지방주민을 선동하여 국민부를 이탈케 하고 또 미리 반목 대항 중인 "엠엘(M. L.)파" 와 연합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국민부'에서도 자파 군인을 집결하여 이에 대하며 일면 중국 군경과 연락하여 반대파의 잠복을 막고 그들의 잠입한 곳을 습격 체포하여 쌍방이 무력에 의해서 격투 암살을 행하고 있는 중 운동 자금의 궁핍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민부 산하 단체'인 "남만 한인 청년 총동맹"은 '국민부'의 전신 '정의부' 당시 그 반대 단체인 "재 중국 한인 청년 동맹" 및 "재만 농민 동맹" (양 동맹은 반석현에 근거한 엠엘 계의 기관)에 대항하는 '정의부' 계의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1924년 4월 조직한 것인데

본 동맹 간부 최봉(崔峯)·고원(高元) 등 일파는 전기 반대 단체인 '재 중국 한인 청년 동맹' 간부 '엠엘파'와 비밀히 기맥을 통하고 정의부의 파괴를 도모하던 중, 동년 5월 중순에는 본 총동맹의 반대 간부 등 10여 명을 홍경 지방에서 총살을 기도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뒤 '정의부'가 '국민부'로 개조된 다음에도 계속하여 반대 간부의 행동을 감시하며 암살 기회를 엿보았으며 동년 10월 중순에는 본 총동맹의 반대측의 간부 최봉·이태희(李泰熙)·지운산(池雲山)·이광선(李光善)·한의철(韓義哲)·이몽렬(李夢烈)의 6명이 체포되어 국민부 간부 김문학(金文學)·김보안(金輔安) 등이 지휘하는
군인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929년 12월에는 국민부 혁명 기관인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변개하여 새로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국민부 중앙 집행 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을 본 혁명당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뒤이어서는 또 "동성 한국인 농민 총동맹"도 조직하였다.

당초 '정의부'가 길림 지방에 지반을 갖고 활동하고 있을 무렵, 당시 그의 반대측인 '엠엘 파' 는 청년 단체를 장악하고 이를 지휘하여 가는 곳마다 반정의부의 기세를 보이므로 정의부는 마침내 길림 지방에서 그 지반을 잃어버리고 흥경(興京) 지방으로 이동하였었는데 후신인 '국민부'는 이 실패에 감안해서 청년 단체로서 "남만 한인 청년 총동맹"을 조직케 하고 이를 지지하여 반대파에 대항하여 왔었다. 

그런데 그 뒤 '엠엘파'는 방향을 바꾸어 농민 운동 단체로 들어와서 이들을 선동하여 반국민부 투쟁에 전력하므로 국민부는 그 대항책으로서 '남만 한인 청년 동맹' 외에 2개 단체를 규합하여 농민 운동 단체인 '동성 한국인 농민 총동맹' 을 조직하고 반대파에 대비하였다.

즉 '국민부' 계의 '남만 한인 청년 총동맹' 및 '남만 농민 동맹' · '남만 여자 교육회' 등 3단체의 대표자들은 1930년 3월 3일부터 수일간에 걸쳐서 "요령성 신빈현 왕청문(汪淸門)에 "집합하여 3단체 통합 대회를 개최하고 운동 기관으로서 새로 "동성 한국인 농민 총동맹"을 조직하고 강령 규약을 제정하며 집행 위원 선거 등 제반 결의를 하고 본 동맹 성립과 동시에 전기 3개 단체는 해산한 것이다.

국민부가 이 일을 착수한 것은 국민부의 전신인 정의부 시대에 있어서 '재 중국 한인 청년 동맹' 등이 각지 주민을 선동하여 정의부 타도를 책모한 결과 가는 곳마다 주민회 등을 조직하고 정의부 탈퇴 성명을 하므로 정의부는 퍽 곤경에 빠지게 되매, 이들 반대 단체에 대항하도록 국민부 계통의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남만 한인 청년 총동맹'을 조직하였던 것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일반 간부들은 그 파인 '재 중국 한인 청년 간부 엠엘파'와 기맥을 통하고 내부 교란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국민부는 반란파의 간부 최환(崔煥) 외의 5명을 모두 암살하는 등 반대파 제거 조치를 하였지만 아직도 반대파는 내부에 남아 있어서 의연히 반국민부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국민부 간부 지도 밑에서 동년 11월 2일 '남만 한인 청년 총동맹' 수습 대회를 열고 간부의 총개선을 하여 반대파의 제거를 단행하고 진용 일신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내부는 의연히 혼란하므로 전기 3개 단체 대표 16명이 '신빈현 왕청문'에 집합하여 합동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다시 조선 공산당 재건파의 이면 공작으로 대표 이외의 청년 다수가 들어가서 국민부의 기반을 벗어나 새로 성립될 단체를 빼앗으려 획책하고 또는 대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려 하였다. 따라서 '국민부'에서는 군인에게 명령하여 이들 반대파를 체포하도록 엄중히 감시하는 중에 3단체 합동 기관으로서 새로 '동성 한국인 농민 동맹'을 조직하고 전기 3단체는 해산하였다.

그런데 본 동맹 창립에 전력한 고이허(高而虛) 등이 집행 위원에 선임되지 않은 것은 국민부 간부들의 불만을 사게 하였다. 그뒤 3월 14일 현익철·고이허 등의 주장대로 당선된 청년 간부를 해임하고 다시 다음과 같이 직원을 보선하였다.


(1) 상무 집행 위원 11인

한창국(韓昌國)·윤인선(尹仁善)·강명선(姜明善)·황세일(黃世一)·고이허(高而虛)·이성(李成)·황운(黃雲)·이장청(李丈靑)·이세극(李世極)·이문수(李文秀)

(2) 심사 위원 5인

차광수(車光洙)·이명서(李明瑞)·황운(黃雲)·이문수(李文秀)·박춘근(朴春根)

(3) 지방 지부 동맹 조직원 6명

이장청 : 관동(寬東)지방, 황세일(黃世一) : 관서(寬西)지방, 윤인선(尹仁善) : 유하(柳河)지방, 이문수 : 길림 지방, "김성주(金誠柱)" : 무송(撫松)·안도(安圖)지방
그리고 국민부 간부 등은 본 동맹에 대하여 국민부의 절대 옹호를 요구하였으나 일부 동맹 간부는 '조선 고아산당 재건설 만주부'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그 지도를 받고 본 동맹을 재건설파의 영도 밑에 넣을 것을 기도하였다.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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