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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는 한국전쟁의 전범..0편. 특별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24 2022-07-15 01:01:53

밝혀지는 한국전쟁의 비밀열쇠



■     한국전쟁 진짜 주범




오늘 대학에서 시사.경제.정치 분야에서, 한국전쟁이 남침이냐,북침이냐며 논쟁중이네요.


반공보수에서는 대부분이 알듯 북한이 침공한게 맞다는 주장인데요.


따는 저도 그리 생각은 하지만서도, 당시 남북이 서로 대치해 국경선을 상호 기습 침범했던 상황이기에,


북침,남침 이런거 무의미하며 차라리 공동침이 아닌가며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반공보수가 공동침이란 논리도 친북논리라며 (남침?)북한 침공이 맞다네요.


김종필 인터뷰도 조작됐다는데, 당시 자료를 읽지는 못했지만, 2011년 5월호 취재중 우발적 실토가 있었는데,

그것이 나오려다 편집되서 않나온걸로 아는데 아닌지요?


한편 중도보수 관점을 들어보니,

한국전쟁의 배경에는 김일성과 이승만의 침략 야욕 뿐만 아니라 일본 식민지배가 축적한 사회적 모순, 두 한국의 분단과 정치혼란, 미소의 일관되지 못한 동아시아 정책 따위가 뒤엉켜 있었다. 즉 서로 상대를 때려 한반도의 왕이 되고자 했으며, 1940년대 말 미국은 북진통일을 외쳐대는 이승만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 이거 말고,

어쩌다 전쟁이 났어? 이렇게 묻는다면 대답하는 사람 혀가 꼬이지 않기가 어렵지 싶다..


「한국전쟁사」2권에는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육군본부 정보국 일직장교 김종필이 포천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7사단 정보처 일직장교의 떨어집니다. 막 떨어집니다.라는 포격 보고가 한국전쟁을 알리는 첫 정보였다고 기록했다. 

반면 「한국전쟁사」개정판 1권은 25일 새벽 01시 육본 상황실로 병력 미상의 북괴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17연대의 상황 보고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자료에는 24일 새벽 1시에 인민군 949의료부대가 38연선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인원배치를 마쳤다는 내용이 있으며 작전 명령은 24일 24시에 하달되었다고 공개된 소련의 외교 문서에 적혀있다.


한국전쟁은 내전적 외형을 지닌 국제전으로 남북의 대립과 좌우의 갈등, 미소의 이해관계가 한꺼번에 폭발한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전쟁 발발의 시점을 어떻게 설정한는가에 따라 전쟁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남한 : 기습남침



남한은 한국전쟁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규정하는 3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
, 1949년~50년 사이 38연상에서 벌어졌던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과 한국전쟁은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1949년 충돌은 연대급 규모였으며 사실상 전쟁과도 같은 국지적인 충돌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다만 1950년 6월 25일은 전면전이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또한 전쟁의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그 성격도 달라진다. 즉 1950년 6월 25일은 북한이 먼저 침공했지만 그 이전은 남한이 먼저 북침한 경우가 많았다.


둘째, 북한의 침공 당시 병력 차이는 두배가 날 정도로 북한군이 우세했다.

남한군은 1949년 중반 10만 명 규모였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군보다 많았고 화력도 우세했다. 반면 북한군은 1949년 9월 소련의 원조를 받으면서 남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를 보면 남침에 필요한 2~3배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북한군의 전투력이 남한보다 우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휘관들의 작전 계획 수립 능력이나 수행력은 남북한 모두 형편없었다. 전쟁 직후 북한군 노획문서나 소련의 외교 문서를 보면 예비병력이나 군수품 보급 계획은 물론 전쟁 수행을 위한 통신조차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으며 우발적인 사태에 대처 미숙을 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소련 군사 고문단의 실질적인 자문이나 지휘가 없었다면 북한의 대남 침공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셋째, 전쟁 징후를 알리는 수많은 첩보가 보고되었으나 대부분 묵살되었다. 이것은 군 수뇌부에 북한 첩자가 있어서 6월 25일 남침에 호응했기 때문에 개전 초반에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논쟁은 일종의 음모론으로 실체가 없는 주장이다. 당시 남한군의 편성·배치는 방어형 개념이 아니라 1949년의 공격형과 마찬가지 형태였다. 그래서 남한군은 충분한 방어에 소홀했으며 북한군의 도발이 있을 경우 언제든지 밀고 올라갈 수 있다는 자만심이 가득했다. 실제로 1949년의 도발에서 남한이 거의 승리를 했으므로 북한군대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북한 : 반격전쟁


「로동신문」1950년 6월 26일자 기사는 반격전쟁이라는 표현을 했다. 주요 내용은 남한군이 해주 방향 서쪽 금천, 철원, 양양 등지에서 북한을 전면 공격 2~3km 영토를 침범했지만 38경비대가 저지했고 인민군과 경비대가 반격에 나서 오히려 3~5km씩 남한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남한의 침공 경로는 1949년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으로 38선을 좌우해서 4등분한 지점이다. 즉 전면전 시나리오와 거의 일치한다. 또한 김일성과 스탈린의 회담에서 강조되어 온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과도 성격이 들어 맞는다. 북한은 남한의 1949년 7월 대공세에 맞춰 군대의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남한군이 실제 공격을 실행할 수단과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자 역으로 반격전쟁이란 개전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제3의 주장 : 남침유도설과 북침설

1973년 굽타가 「한국전쟁 어떻게 시작되었나」에서 개전 당일, 옹진 주둔 남한군 17연대가 해주를 공격했으며 북한은 방어적 대규모 전쟁을 실시했다는 것으로 남한의 선제 북침론이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과 남한이 북한의 공격을 알고 있었지만 확전을 위해서 묵인했으며 이승만·덜레스·맥아더·장제스의 음모라고 한다. (※I.F. 스토운 「한국전쟁 비사」)이후 브루스 커밍스 등은 남한이 먼저 공격을 개시해서 북한군을 유인했다는 남침유도설로 발전했다.


「한국전쟁사」에는 6월 25일 오전 10시 17연대에게 적을 무찌르면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의 전쟁지도」를 쓴 김행복은 개전당시 육군본부 내에는 정상적인 지휘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17연대의 일부 병력이 무엇을 지시받고 무엇을 수행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해주공격설(해주점령, 옹진침공이라고도 한다)


1950년 6월 26일 북한의 방송을 요약하면  남한 17연대 소속 맹호부대가 6월 23일 오후 10시 은파산 일대에 포격을 시작해서 6월 24일 새벽 4시까지 계속했다.
6월 25일 오후 2시 30분 북한 군대는 옹진 반도의 수동까지 진격하는 동안 유격대가 남한군대를 교란시켰다
는 내용이다.


남한은 6월 26일 오전 11시 국방부 보도과가 해주 점령을 공식 발표했으며 「뉴욕타임즈」,「워신턴 포스트」등은 6월 26일자 기사로 17연대의 2개 중대가 해주를 점령했다는 보도를 했다. 또한 주한영국대사관 무관은 6월 27일 17연대의 2개 대대가 해주를 점령했다고 본국으로 전문을 보냈다.


6월 27일자 「동아일보」1면 톱기사는 국군정예북상 총반격 전개중/해주시를 완전 점령이었다. 보도 내용은 옹진 방면 부대는 통신이 불량하여 명확치 않으나 그 일부가 해주시에 돌입했으며 일부는 즉시 전선을 수축 중에 있으며…. 라는 국방부 보도과의 발표문 인용이었다.


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1권(1997년 개정판)은 해주공격을 오보이자 해프닝이라고 했다. 


이 책에는 연합신문 기자 최기덕이 전쟁 발발 시점에 옹진을 방문 취재하던 중 17연대장 백인엽을 만났는데 백인엽이 말하기를 서울 가거든 이 말 한마디 전해달라. 백인엽이는 부대를 지휘하여 해주로 진격하겠다. 라는 말을 최기덕은 듣고 서울로 돌아와서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에게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 해주공격설의 실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현수 대령은 한국군의 사기 양양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해주점령을 발표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공식 입장이다. (※김현수 대령은 해주점령을 보도한 KBS라디오의 방송 직후 전사했으며 백인엽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뼘했고 최기덕은 사실이라고 했다)



17연대는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증오하는 북한 출신들인 서북청년단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해주지역의 점령을 기정 사실화 했고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반격과 북진을 주장했고 6월 26일 국회에 출석해서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두사람의 정황 판단은 KBS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방송되었다.

중앙일보사가 펴낸 「발굴자료로 쓴 한국 현대사」에는 1950년 7월 초순 신성모가 작성해 이승만에게 보고한 전황보고가 실려 있는데, 7월 4일자를 보면 호주 비행사가 아군 진지를 적 진지로 오인해서 폭격……특히 17연대장 백인엽이 부상당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백인엽을 해주점령 장군으로 소개했다.


안용현의 「한국전쟁 허와 실」에는 1950년 3월 25일 하달된 육본 작전명령 38의……6. 제17연대는 옹진지구를 방어하라. 특히 적주공이 제1사단 정면 이동지구에 지향될 경우에 있어서 전력으로 하는 해주 이북 지구에 대한 유격전을 준비하라. 를언급했다.
 

즉 전면전이 벌어져 북한군이 서울 침공을 할 경우 17연대는 해주 이북에서 유격전을 실시해서 북한군의 공세를 분산시키라는 내용이 었다.


반면 17연대 부연대장 김희준의 증언은 (1950년 3월 육본 작전회의에서) 국지전일 경우 17연대는 진지를 고수하고 전면전일 경우 LST2척으로 인천 철수를 지시받았다고 했다.


로버트 소이어가 쓴 「주한미군사고문단사」에는 공격이 필시 전면 공격일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즉시 주한미군사고문단KMAC 참모들은 몇 개월 전 수립된 방어 계획의 실행을 한국인들에게 권고 하였다. 이는 옹진 반도에서의 철수, 임진강 서쪽 부대의 남쪽 강기슭으로 철수, 남부의 예비사단들을 북진시켜 반격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

여기서 방어계획이란 육본 작전명령 38을 말하며 초기(경계선 침투)-제2기(주 저항선 전투)-제3기(최후 저항선 전투)이다. 또한 각 부대의 임무 중 17연대는 옹진 견제 공격과 유격전을 펼치라는 것이었다.


상황을 종합하면 육군본부는 미군사고문단의 협조를 받아 북한군 침략 방어 계획을 수립했는데 그 중 하나가 17연대의 해주 침공이었다. 따라서 백인엽이 최기덕에게 한 발언은 방어 계획이었다. 다만 17연대가 6월 28일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통신이 두절되자 육본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태를 유리한 쪽으로 발표 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북한이 도발받은 반격전쟁이라며 북침을 계속 선전하자 남한은 방어 계획으로 수립한 해주공격이 성공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해서 해주공격자체를 부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7연대의 해주점령설은 초기 전황파악에 엄청난 오류를 끼쳤는데 온양 주둔 25연대는 여유 탄약 조차 챙기지 않고 북진을 위해서 서울로 왔으며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6사단은 춘천 시민들의 대피명령도 내리지 않고 있다가 며칠 뒤 시가전 한번 치르지 않고 시민들보다 먼저 춘천에서 철수 했다. 또한 미 극동사령부의 전황판단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남한군이 모든 전선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 브루스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도쿄의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가 간행한 [정보요약]을 근거로 17연대의 해주 북침을 주장했다.



· 제2847호(1950년 6월 26일 오전 7시 현재 38선 상황도)



옹진반도 동남단인 부포항 부근에 17연대 병력 대부분이 몰려 있으며 동측방인 벽성-은파산 방향으로 17연대의 1개 대대와 1개 포병 중대가 해주 진군으로 표시되어 있다. 옹진에서 해주 진격은 은파산 옆 도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주요 작전 도로는 인민군이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인민군의 병력을 무찌르고 진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미군은 다른 경로를 통해 정보를 들었거나 최소한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지도를 보면 17연대 3개 대대와 연대 본부는 인천 철수를 서두르고 있는 반면 옹진의 정북 방향을 지키고 있던 제1대대와 예비병력인 제2대대 및 포병중대와 연락 두절이 생겼고 모중의 작전 지시를 받고 이들 부대의 위치를 해주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제2849호(1950년 6월 28일 오전 5시 상황도)



17연대는 인천으로 돌아온 반면 여전히 1개 대대와 포병중대 병력은 해주 점령을 나타내고 있다.



· 제2850호(1950년 6월 29일 오전 5시 상황도)



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병력이 아무런 설명 없이 상황도에서 사라졌다.


정병준은 「한국전쟁(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에서 17연대는 양분되어 3개 대대는 모두 6월 26일 옹진에서 해상으로 철수 했지만 나머지는 연락이 끊긴 채 6월 28일 인천으로 합류할 때까지 생사를 알지 못했다. 백인엽과 제3대대는 통신장비를 갖춘 LST를 타고 철수함으로써 그 위치가 확인되었지만 통신이 두절된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민간어선을 타고 6월28일 오전 6시 인천으로 귀향……혼란스러웠던 정황 속에서 육군본부와 미 극동 사령부는 (방어계획에 따라) 이들의 해주진공을 강력히 희망했고……[정보요약]의 정황도가 만들어졌다. 


해주 점령은 상황도에만 존재하는 허구라며 커밍스가 제시한 가설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나타냈다. (※정병준은 커밍스를 가리켜 자신이 수립한 유도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리한 해석과 잘못된 자료 인용·오독 등을 집중적으로 범함고 있다면서 탁월한 그의 저서의 그림자를 드리웠다.라고 했다)


① 3일간 해주를 점령했다는 병력의 구체적인 표시가 없다.


② 북한군이 해주 점령 부대를 공격했다거나 포위한 흔적이 상황도에 묘사되어 있지 않다.


③ 해주점령을 한 상태에서 부대의 이동이 전혀 없으며 철수 경로가 없다.


④ 옹진 반도 중앙부터 좌측을 방어하고 있던 병력은 17연대 제1대대와 중앙의 제2대대였는데 1대대장은 6월25일 오전 6시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아 전사했으며 제2대대는 송호림 소령의 지휘를 받아 사곶으로 철수중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해주 침공 부대를 지휘 했는지 실체가 전혀없다.


해주점령은 북한이 주장한 북침의 근거가 되었다.

당시 해주는 인민군 6사단 방호산 부대와 제3경비여단장 최현의 막강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최현은 김일성, 김책, 최용건과 함께 만주 항일 게릴라 4인방이었으며 1982년 4월 그가 죽자 김일성은 영화 혁명가를 만들어 추모할 정도로 김일성 체제의 중심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항일 유격대 투쟁시 부상당한 김일성을 업고 뛰어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방호산은 조선인민군 영웅으로 미군은 남북한 통틀어 한국전쟁 중 최고의 지휘관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방호산은 연안파로 나중에 숙청되지만 1951년 1월 제5군단장까지 진급했으며 최현도 군사위원회 위원까지 역임했다. 그러므로 해주가 점령당한 상태에서 이들 지휘관이 승승장구 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방송도 해주 점령을 보도한 KBS방송을 거짓이라고 즉각 부인하는 모순을 보였다. 다만 옹진 주둔 17연대에게 적을 무찌르며 퇴각하라 라는 명령이 내려지자(명령권자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명령은 실재했다)대부분의 병력이 LST로 탈출했다. 그러나 지휘관을 잃은 1대대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철수하는 가운데 일부가 해주를 경유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이상…   특별 0편 끝.


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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