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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禹鍾昌)李海瓚 총리는『지하조직의 거물』…
월간조선인터넷통신독 3 307 2005-04-06 09:46:49
이 기사는 월간조선 인터넷통신 33호에 있는것임.


李海瓚 총리는『지하조직의 거물』…검거된 북한 공작원 진술에서 내사 시작


이해찬 국무총리


속보=기자는 복수의 對共수사관들을 만났다. 이들은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가 1987년 민통련(民統聯) 정책위원회 차장 시절에 北에 주민등록증을 건네준 혐의를 내사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터뷰에 응하기 전에 기자에게 물었다.

『月刊朝鮮 인터넷통신 보도(3월24일자) 이후 남영동에서 난리가 난 것을 알고 있느냐』

남영동은 서울 남영동 對共분실을 말한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자는 모르고 있었다.

『국무총리실에서 1987년에 있었던 李海瓚 총리와 관련된 수사 기록을 전부 넘기라고 지시했다. 총리실에서는 빨리 보내라고 재촉하는데 기록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리고, 당시 수사관들은 거의 다 남영동을 떠났고, 그렇다고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넘어갈 수도 없고…. 기사 때문에 남영동만 피해를 보고 있다』

다음은 이들과의 일문일답.

-李海瓚 총리가 과거 北에 주민등록증을 보냈다는 사실을 남영동 對共분실에서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검거된 북한 공작원 진술에서 나왔다. 그에 따르면 북한 對南 공작부서에서는 서울대 학생운동권에 「큰 것(조직)」 하나를 심어 놓았고, 그 조직과 관련된 이의 주민등록증이 北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를 토대로 확인한 결과, 「큰 것」의 실체가 李海瓚씨로 드러났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가 民統聯 정책위 차장으로 있던 1987년 무렵이다』

-수사는 어떻게 했나.
『고향(충남 청양)에 가서 對共 용의점을 탐문하고, 그의 집 주변에서 노점상으로 위장해 잠복근무도 했다. 미행도 했다. 승용차로 움직일 때 따라 붙었다가 눈치를 채고 차선을 바꿔가며 도망가는 통에 놓치기도 했다. 워낙 노련해 미행에서 실패한 적이 몇 차례 된다』

-담당 수사관이 몇 명이었나.
『책임자는 과장이고 4명이 동원됐다. 과장은 몇 년 전에 사망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면 바로 연행하면 될 것 아닌가.
『李海瓚 총리는 보통이 아니었다. 한번은 우리가 추적하는 사건과 별개의 件으로 수배된 적이 있었다. 수배 기간 중에 그는 한번도 고향에 가지 않았는데, 수배 해지 직전에 고향에 나타났다.

수배 해지가 되는 줄,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아무튼 고향에 나타난 그는 청양경찰서를 찾아가, 죄 없는 사람을 수배했다며 경찰관들의 뺨을 때리며 난리를 쳤다. 그런 거물을 확실한 증거 없이 체포했다가는 경찰관만 다쳤을 것이다』

-李海瓚 총리는 어느 정도의 인물이었나.
『당시 그의 직책은 民統聯 정책위 차장이다. 정책위 실장은 장기표(張琪杓)씨였다. 張琪杓씨 행적은 우리(남영동 대공분실)가 검거한 상태에서 조사했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데, 李海瓚 총리는 민통련 핵심 간부 모임에 참석 멤버로 이름이 올라 있었지만 현장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다. 그는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지하 조직의 거물이었다』〈계속〉

[禹鍾昌 月刊朝鮮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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