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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보천보전투의 ‘김일성장군’ 아니다(미래한국)
미래한국신문독자 0 443 2005-04-13 21:44:06
이 기사는 미래한국신문 http://www.futurekorea.co.kr 에 있는 것임.

김일성, 보천보전투의 ‘김일성장군’ 아니다


蘇, 북한공산정권수립 이용 목적으로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켜...2002. 8. 27 미래한국기사
박갑동씨, 당시 사건으로 복역한 박달·박금철이 김일성 장군아니라고 증언

일본 육사출신의 보천보 항일투쟁의 주역 김일성 장군, 본명은 김광서(함경남도 북천군태생 1887 ~1937년 11월 전사)

현 정부의 치적만을 국정교과서에 기술, 역사교과서 검정위원 선정 형평성 문제 등으로 비난의 대상이 돼온 교육부가 이번에는 북한 김일성의 대표적 항일무장투쟁으로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해 온 보천보 전투를 한국 근 현대사 검정 통과본 역사 교과서에 실어 비판이 일고 있다.

파문의 이유는 보천보라는 말 자체가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을 상징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주도했고 항일무장투쟁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북한의 인기있는 대표적 대중악단 이름이 바로 보천보경음악단이고 보천보햇불상체육대회와 같은 명칭의 사용에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거짓조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실제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장군을 연구하다 3년전 타계한 이명영 교수(전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는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1974년 출간, 신문화사)을 통해 북한의 조작사실을 밝혔다.

이 교수는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이고,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變名)변명으로 행세했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김성주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하여 김성주가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87)씨는 “연설에 앞서 스치차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77)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치차코프는 여기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역설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증언의 주인공은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70·현 고대 북한학과) 전임강사다. 재일동포로 조총련의 일본내 조선대학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가르친 바 있다. 허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일본 육사출신의 보천보 항일투쟁의 주역 김일성 장군, 본명은 김광서(함경남도 북천군태생 1887 ~1937년 11월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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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같은 증언과 기록들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보천보 항일투쟁 선전이 조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보천보전투와 관련 “논란이 많은 내용인 만큼 앞으로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교육부의 직권 수정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오진석기자 2005-04-12 오후 7: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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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나찌 2005-04-14 05:01:17
    이영명 교수의 학설은 이미 틀렸음이 밝혀졌습니다. 만주에 여러 김일성이 있었고, 동북항일연군과,보천보전투의 장본인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임이 이미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사실인 걸 사실 아니라고 부정해봐야 머가 남습니까, 남는 건 씁쓸함뿐입니다. NSC 이종석 의장이나, 하와이대 서대숙교수같은 재미학자에 의해서도 북한 김일성의 항일운동사실은 이미 사실로 거의 결정되다시피 했습니다.
    가짜김일성론을 대표적으로 주장했던 학자가 이영명교수일 겁니다. 근데 그거 다 헛짓꺼리로 들통났습니다.
    헛짓꺼리인걸로 들통난 사실을 진짜인것처럼 주장해봐야, 쪽팔림만 더할 뿐입니다. 김일성 아버지인가 할아버지가 김형직의 항일운동자료까지 남한에서 발견되고 있는 지금 실정에서, 돼지도 않는 사실을 주장해봐야, 쪽만 팔린다니깐요....만주에 김일성이 여러명되었습니다. 항일게릴라전펼치던 사람들이요. 그리고 그 김일성중에서도 북한 김일성은 만주 무장항일운동가들중에 주도적인 인물들 중에 한명이었고, 북한 자체가 전부 다 만주에서 항일무장운동가들이 모여서 만든 나라입니다. 남한은 상해임정,중국 상하이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가, 이승만때문에 다 축출되고, 다시 일제시대 친일파 관리들이 세운 나라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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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나찌 2005-04-14 05:25:06
    지금 학계의 논점은 김일성의 항일여부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김일성의 항일운동의 자주성의 문제입니다.
    와다 하루끼같은 일본학자의 경우에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철저하게 중국에 종속적이었다는 것이고,
    와다 하루끼의 제자인, 이종석이나, 서동만같은 사람에 의해서 밝혀진 것은 가짜김일성론이 신빙성이 별로 없다는 것, 그래서 강만길같은 학자가 김일성의 항일게릴라활동오 항일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공개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운동이 중국팔로군에 상당히 종속되어있었는가, 아니면 별도로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점인데, 제 생각에는 별로 자주적이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근데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요. 독립적인 김일성의 부대가 있었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고, 북한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항일운동부분은 부정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고,김일성의 항일운동의 자주성여부 이전에 김일성만큼 항일무장운동을 만주에서 한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지요.

    김일성 연구의 쟁점
    정성장(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김일성만큼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조선로동당은 김일성을 ‘인류의 태양’, ‘절세의 위인’, ‘혁명의 위대한 전략가’,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창조와 건설의 영재’ 등으로 선전하여왔다. 반면 남한정부는 오랫동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사실을 부인하면서 북한주민들이 김일성을 싫어하면서도 공포감 때문에 복종하는 척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김현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향자나 탈북자들은 북한체제를 비판하면서도 김일성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가는 경향을 보여 왔다. 황장엽도 김정일에 대해서는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김일성을 평가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김일성에 대해 매우 다양한 ― 때로는 상반된 ― 평가가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오랫동안 남과 북 모두에서 체제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로 인식되어 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 결과 1980년대까지 국내에서 김일성에 대해 비교적 진지하고도 객관적으로 진행된 연구는 거의 드물고, 주로 재미 한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연구성과는 아직까지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김일성 연구에서 오랫동안 최대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로 군림한 김일성이 일제시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김일성이 가짜인가 진짜인가 하는 진위논쟁이었다. 가짜 김일성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재만 한인 공산주의운동 연구』, 『권력의 역사』 등을 집필한 이명영을 들 수 있고, 그 외에도 허동찬, 박갑동 등 가짜 김일성론의 확산에 기여한 많은 논객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짜 김일성론이 신빙성 없는 자료들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관련 문헌에 대한 불철저한 검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80년대 후반 이종석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짐으로써 가짜 김일성론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급속히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가짜 김일성론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외에 그만큼 항일 투쟁 경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1990년대에 들어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관련된 논쟁은 그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투쟁성과에 대한 평가의 문제로 이행하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서대숙은 그의 저서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에서 1930년대 김일성이 참여한 동북항일연군이 만주국에 살고 있는 한족(중국인)과 조선족이 함께 한 중.조 연합의 항일 운동이었으나 항일연군의 지도적 역할은 몇 명의 예외를 제하고는 전부 중국 사람이 맡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항일 운동이지 조선 독립 운동의 일부분이거나 조선 민족의 항일운동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한다. 서대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는 중국인, 조선인을 막론하고 마지막까지 귀순하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지도자가 김일성이었으며, “이런 측면에서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이 비록 중국인들과 함께 한 것이지만 훌륭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한다.
    한편 이종석은 1934년에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조선해방을 위한 조선인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간난의 세월을 투쟁해온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매몰시켜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이종석은 더 나아가 김일성이 “조중 국경지역이며 조선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만 일대를 배경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공산주의자들 중에서는 최고지도자”로서 그의 명망성이 해방 직후 북한 전역에서 자율적으로 분출하고 있던 지방인민정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지도자로 김일성을 선택하게 하는 제1의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해방 후 그의 권력 장악 배경에 대한 평가가 상당부분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는 해방 후 김일성이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로 부상하는데 그의 명망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반면, 그의 항일투쟁을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는 소련당국의 지원이 그의 권력 장악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의 명망도와 소련당국의 후원은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상호 모순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보완적으로 작용하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남북분단 등 여러 요인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바로 위에서 언급한 두 요인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 최고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해방 후 북한에서 생각하기 곤란한 일이었다.
    김일성 연구에 있어서 이밖에도 많은 다른 쟁점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기독교가 김일성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것인데, 많은 연구자들은 북한에서 이루어진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가 김일성이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구소련에서 스탈린에 대해 이루어졌던 개인숭배를 모방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거의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데 있어서 김일성 본인보다 그의 후계자 김정일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무시하고 있다. 김일성 연구가 심화되면 이 같은 오해들이 서서히 불식되겠지만, 김일성과 관련하여 해명해야할 주제들이 아직도 많이 쌓여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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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나찌 2005-04-14 05:26:59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정성장(세종연구소 연구위원)
    김일성의 생애 중 국내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부분은 그의 항일무장투쟁 시기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가짜 김일성론의 문제점이 1980년대 말부터 이종석 박사 등에 의해 명백하게 밝혀지고, 이후 김일성의 업적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쟁점이 바뀌게 되었다. 물론 가짜 김일성론이 근거 없다고 해서 실제보다 과장되게 선전해온 북한측 주장이 옳다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만주에서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1930년 5월 국제공산당(코민테른) 동양선전부는 조중공산당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재만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일국일당제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일성도 이 원칙에 따라 1931년 10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만주 전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일유격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김일성도 1932년 4월 안도에서 소규모의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안도유격대는 곧 왕청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그는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김일성은 또한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갖추어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1934년 3월 결성)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이 같은 사실은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초기 군사지휘보다 정치사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일성은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의 사장(師長)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고 그가 거느리는 병력은 약 600명 정도였다. 곧이어 1936년 7월에는 유격대 편제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김일성이 비록 중국공산당의 지도 밑에 있었으나 그가 거느린 부대원의 과반수는 조선인이었다. 김일성은 제6사 사장 시절 해방 후 그의 권력 장악 및 강화에 도움을 준 두 가지 일을 해내게 된다. 그것은 길림성 장백현과 함경북도 북부지방 일대에 반일통일전선조직인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을 주도한 것과 1937년 6월에 감행한 보천보전투이다.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을 통해 김일성은 박금철, 이송운 등 함남북부지방의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를 갖게 되었다. 김일성이 1937년에 감행한 보천보전투는 전투로서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유격대 편제 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1939년 3월말까지 김일성은 그의 부대를 이끌고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100여 일간의 행군길에 올랐다. 엄혹한 자연과의 투쟁, 극심한 식량난과 피로와의 투쟁, 무서운 병마와의 투쟁, 적과의 투쟁 등으로 고생이 너무나 막심했기 때문에 북한은 그 행군을 가리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하였다.

    1940년 3월에 김일성은 180명으로 구성된 마에다 토벌대를 전멸시키는 등 일제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과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1939년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로 만주의 유격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극동지역 소련군은 일제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영내로 도피하는 유격대 문제로 일.소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우려하여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유격대의 입경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김일성은 1940년 11월경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중단한 채 소련으로 들어가 해방을 기다리게 되었다.

    1930년대 중후반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동북항일연군의 중간급 간부로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항일연군에는 조선인 상관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관들 중 일부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희생당하였고, 다른 일부는 일제의 회유공작에 넘어가 귀순해 버렸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의 상관들 못지않게 잘 싸워서 항일투쟁 말기에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해방 직후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가지고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비록 좌파운동이기는 하였으나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애국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따라서 구체적 사료에 의해 뒷받침되는 사실(史實)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북한을 객관적 근거 위에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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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나찌 2005-04-14 05:29:02
    88여단 시절의 김일성
    정성장(세종연구소 연구위원)
    1930년대에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김일성은 1940년 11월경 소련에 입경(入境)함으로써 이후 1945년까지 소련 극동지역에서 주로 정치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결전의 순간을 준비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감추어왔는데, 이 사실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면 1940년대 전반기 동안에도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몇몇 운동가들에 비해 김일성의 선명성이 떨어질 것을 북한지도부가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김일성의 잠재적 경쟁세력이 모두 제거되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공고하게 뿌리를 내린 1990년대 초반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1940년대 전반기 소련 체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물론 김일성의 회고록에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거나 과장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어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당시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측 자료나 일본측 자료의 공백부분을 메워주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1940년대 전반기의 김일성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연구로는 단연 와다 하루끼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40년 김일성이 소련 입경을 결정하게 된 데에는 1939년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로 만주의 유격대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한 사실과 소련의 입국 요구가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일제의 추격을 피하여 영내(領內)로 도피하는 유격대 문제로 인해 일․소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우려하던 소련은 1940년 9월초 소련극동군 당대표 왕신림(王新林) 명의로 동북항일연군 각 로군의 영도인(領導人)에게 전신을 보내 12월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당과 유격대 간부의 회의를 소집한다고 통보하였다. 나치 독일과의 힘겨운 전쟁을 치루고 있던 소련이 극동에서 일본의 도발을 막기 위해 만주에서의 유격전을 종결시키고자 한 것이 이 회의 소집의 주된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김일성의 입경은 소련측과 연락이 없었던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김일성은 월경(越境) 직후 소련군에 의해 억류되어 감금당한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군장 주보중의 개입에 의해 김일성은 곧 석방되었고, 1940년 말부터 1941년 초까지 하바로프스크에서 진행된 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는 만주에서의 항일유격운동의 장래문제와 소련극동군과의 상호 협조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다. 소련은 중․조 연합의 항일유격대에게 두 개의 야영지를 제공하였는데, 동남만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보로실로프 근처에 있는 남야영에, 북만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하바로프스크 부근의 비야츠코에에 설치된 북야영에 자리를 잡았다. 김일성은 남야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입소(入蘇) 전에 결혼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1942년 2월 아들 김정일이 태어났다.1942년 하반기에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던 항일유격대를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라는 하나의 편제로 묶으면서 김일성은 보로시로프에서 비야츠코에로 이동하게 되었다.

    교도려(敎導旅)의 목적은 “전동북의 항일구국혁명 군사정치간부를 양성하는”것이었다. 동년 7월말에 결성된 교도려의 여장(旅長)은 중국인 주보중이 맡았으며, 조선인 간부로는 김일성보다 12살이 위인 최용건이 부참모장을, 그리고 김일성이 4개의 영(營) 중에서 조선인 중심으로 결성된 제1영 영장을 맡았다. 교도려의 조선인 간부들 중에서는 부참모장이며 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 서기인 최용건이 연령이나 경력 그리고 직책 등을 고려할 때 단연 최고의 실력자였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교도려에서 영장을 맡고 그 위에 당지부국의 부서기에 뽑혀 최용건을 보좌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지위상으로 보면 조선인 중에서는 2인자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최용건에게 없는 결정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최용건이 북만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비해, 김일성은 동남만에서 활동하며 조선북부로 공격해 들어간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1944년 2월 주보중이 소련극동군의 장군과 총정치부 선전부장 메끌레르에게 “군관교육을 잘 하고 있는 자”로 추천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소련의 대일 개전이 이루어지기 전인 1945년 7월 주보중과 최용건은 동북당위원회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동북당위원회를 해소하고 신동북위원회를 발족시킴과 동시에 조선공작단(朝鮮工作團)을 설치하는 결정을 내렸다. 조선공작단의 단장은 김일성이, 당위원회 서기는 최용건이 맡았다. 결과적으로 조선공작단의 영도공작은 김일성이 전면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김일성은 조선공작단 단장을 맡음으로써 소련의 한반도 북부 주둔과 함께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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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나찌 2005-04-14 05:39:54
    북한 자체는 친일파 제거와 일제식민지시절 항일무장독립투쟁이라는 역사적인 정당성도 가지고 있지만, 어찌보면 김용의 무협지 소호강호에 나오는 일월신교같은 종교집단 같은 형태로까지 발달한 특이한 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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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나찌 2005-04-14 05:59:26
    그래서, 독일나찌가 헛소리를 한두마디 더 지껄여보면, 북한이 미국한테 꼭 적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북한도 알고 봤더니, 미국의 뜻하지 않았던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언제나 친구는 친구가 될려고만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의 적의 적이 친구가 되기도 하고, 나의 적의 친구가 내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국도 기독교적인 선악의 이분법으로만 우방과 적국을 가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원화해서 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럽에서 찢겨져 나온 미국이 앞으로도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독일나찌처럼 졸딱 망하고 나서 신세한탄하지 말라는 뜻이다. 출세하고 싶어서 출세하는 사람도 없지만, 망하고 싶어도 망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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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4-14 12:44:01
    그렇게 해박하신 독일나찌님을 탈북자동지회 명예회장으로 높이 추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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