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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주민들 김일성 아닌 ‘조세웅 만세’를 외친 까닭
주성하기자 2010-12-31 07:18:28 원문보기 관리자 919 2011-01-06 01:30:50

1984년 12월 어느 날, 함경북도 도당 책임비서실.


조세웅 책임비서가 주재하는 회의에 도당 조직비서, 보위부장, 안전부장 등 도내 간부들이 모두 모였다.


조세웅 비서가 먼저 조직비서에게 물었다.


“조직비서 동무, 동무 집에는 새해 설날 마실 술이 얼마나 있소?”


“그런 걸 다 물으십니까. 혹시 필요하지면 제가 몇 병 보내드리겠습니다. 허허”


“보위부장 동무, 동무는 몇 병정도 준비해 놓았소?”


“아, 충분히 있습니다. 비서 동지가 오신다면야 좋은 술 좀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럼 안전부장 동무는?”


“저도 부족하지 않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동무들은 그러니까 설날용으로 못해도 서너 병 이상은 갖고 있단 말이지요?”


“아, 예...어흠. 으흠.”


“동무들은 간부니깐 설날에 필요한 술들이 저절로 생기지만 우리 도내 인민들은 설날 겨우 술을 한 병 가지고 치르고 있소.


술 한 병 공급받아서 설날 아침에 이집 저집 세배 다니면서 부어주고 나면 마실 술조차 없소.


이래서야 되겠소? 설날까지 며칠 안 남았지만, 어떻게 하든 술 두 병씩 공급하도록 하시오.”


다음해 설날 함경북도 주민들은 뜻밖에 술 두 병씩 공급받고 웅성거렸다.


벌써 십여 년째 국가 공급이 끊어져 있지만 1980년대 중반은 북한 경제가 그나마 돌아갈 때라 설날에 명절 공급을 좀 할 때였다.


한 집에 술 한 병, 기름 반병, 당과류 조금, 돼지고기 500그램 정도 등 약간의 공급이 있었다.


그래봤자 술은 늘 한 병을 받았는데 그 해에는 난데없이 두 병씩이나 공급해주니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조세웅 비서의 지시가 있었다.

조세웅 비서

1985년 겨울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함경북도 도 소재지인 청진시의 동상 앞을 지나던 조세웅 비서는 새벽에 동상을 청소하려 나온 한 어린 학생 남매를 보게 됐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한 명은 양말을 신었는데 다른 한명은 맨발이다.


“넌 양말을 왜 안 신었니?”


“동생이 신었습니다.”


“그럼 넌 없는 거니? 양말 한 개로 돌려가며 신는 거니?”


남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에 돌아간 조세웅 비서는 간부들 앞에서 아침에 본 사연을 이야기 해주면서 “우리가 아이들도 헐벗게 하면서 무슨 혁명을 한다는 거냐”면서 가슴 아파했다.


그해 함경북도의 모든 학생들은 중국에서 수입해 온 단복(체육복) 한 벌과 양말을 선물로 받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단복이라는 것을 처음 구경했다. 아니, 쟈크(지퍼)로 올리고 내려입는 옷 자체를 처음 구경한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당시는 어른들도 옷은 당연히 단추를 채워야 한다고 알고 있던 때였다.


단복을 사온 외화는 도에서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비축했던 것이었다.


조세웅 비서의 일화는 정말 많다. 인민들에게 계란 공급이 원활치 않자 조세웅은 닭공장을 몰래 시찰하면서 간부들이 저마다 차로 계란을 빼돌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닭공장을 드나드는 간부들의 차번호를 몰래 적게 한 뒤 한번 이를 크게 문제 삼았다.


이후부터 간부들의 닭공장 출입은 뚝 멈췄고 주민들에게도 계란이 공급되게 됐다.


함경북도는 척박한 지역이다. 하지만 1982년 조세웅 비서가 부임해 온 뒤로 함경북도 사람들은 다른 도가 부러워할 정도로 생활수준이 나아졌다.


여기에는 식량이 부족하면 직접 황해도까지 달려가 쌀을 실어오는 가하면, 늘 인민들 속에 들어가 고충을 듣던 조세웅 비서의 역할이 컸다.


그의 작풍을 보면 암행어사처럼 몰래 공장을 찾아가서 실태를 요해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체격이 왜소했다. 그래서 공장에서 도당책임비서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거 웬 늙은이가 주제넘게 노는가”면서 수모를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비밀시찰은 이어졌다.


이러한 조세웅에 대해 인민들은 존경과 사랑으로 화답했다. 조세웅 신화는 전국에 소문이 났고 조세웅 같은 간부가 있어야 인민이 잘산다고 수군거렸다.


조세웅 비서는 1988년 부총리 겸 건설공업건재위원장이 됐다가 1989년 평안북도 도당책임비서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평안북도 인민들이 “조세웅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몇 년 뒤 신의주를 방문한 김일성은 한 간부가 “인민들이 수령님 만세를 부르지 않고 조세웅 만세를 부르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고하자 “조세웅 만세는 나에 대한 만세입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속으론 매우 편치 않았을 것이지만, 산전고초를 다 겪은 이 노회한 독재자는 겉으로는 매우 대범한 듯이 대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세웅 신화의 종말이었다. 이후 조세웅은 계속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새해 설날을 앞두고, 지금은 고위층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온통 탐관오리밖에 보이지 않는 북한을 바라보니 인민들에게 전설처럼 남아있는 조세웅이 문뜩 생각났다.


-다음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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