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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기]빛을 찾아 만리6 - 홍은영
동지회 11 6749 2005-10-26 10:52:49
빛을 찾아 만리 홍은영(평양시 모란봉 구역 학생)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이제 오니 나 홀로 남았다
낙엽 따라 떨어진 이 한 목숨
가시밭길 헤치며 걷는다
열 여섯 살 꽃나이 피눈물 장마
아 누구의 잘 못인가요 누구의 잘 못인가요

배고플 땐 주먹을 깨물었다
목마를 땐 눈물을 삼켰다....

이 노래는 간리집결소, 고원집결소, 증산노동교양소로 방황할 때 우리 꽃제비들이 부르던 노래에요. 사랑하는 부모님의 품속에서 한창 희망에 넘쳐 공부하고 뛰놀고 하여야 할 나이에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잃고 장마당에서, 역전에서 단지 살기 위해 허우적거렸을 뿐이에요. 그게 도대체 누구의 잘못 때문이에요. 정말로 누구의 잘 못 때문이에요...

그날 이후 언니는 임산 사업소 연구실 관리원으로 나가기 시작하였고 저는 다시 그곳에서 학교로 다니기 시작하였어요. 두 말할 것 없이 심심산골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곳에 와서라도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니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던 저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얼마간 다녀보니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요. 무엇보다도 그 학교는 몇 몇 간부네 자식들만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평양에서 살다가 추방되었거나 성분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분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어요. 또 평양에 있는 학교들에서는 툭하면 아이들에게 락카를 가져오라, 신나를 가져오라, 휘발유를 가져오라고 해서 애들을 울리기까지 하는데 거기서는 그런 것을 가져오라는 말이 없었어요. 대신 도라지를 캐오라, 세신을 캐오라, 하긴 했지만 그것들은 조금만 힘을 들이면 산에 가서 얼마든지 캐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캐가지 못해 벌을 서고 비판을 받고 하는 일은 없었어요.
하지만 역시 산골은 산골이었어요. 그 곳에서는 국가 종이 사정이 긴장하다(어렵다)고 하여 그 때에 벌써 몇 년째 교과서를 공급해 주지 않아 선생님들조차 겨우 한 두 권씩 가지고 있는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어 5~7명 당 교과서 한 권씩 돌아갔는데 그 나마도 몇 년씩 보던 것이어서 떨어져 나가고 찢겨진 것이 절반이었어요. 학습장 사정은 더구나 한심했어요. 거의 모든 애들이 학습장은 한 두 권씩 가지고 다녔는데 한 권에 몇 개 과목씩 이름이 적혀 있어 무슨 학습장인지 알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애들은 그런데 신경쓰지 않았어요 어차피 공부를 잘해도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할 것인데 공부는 해서 뭘 하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더구나 그 때에는 식량 사정이 악화돼 애들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 40명 넘는 학급에 3~4명만 나온 적도 있었어요. 거의 모두가 먹을 것 구하러 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도 한번은 언니한테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애들을 따라 산에 가서 칡뿌리도 캐오고 도라지나 둥글레 같은 것을 캐오면 어떻겠는가 말했던 적이 있었어요. 사실 그때 언니가 연구실 관리원으로 일하면서 가끔씩 통강냉이도 타오고 감자도 얼마간씩 타왔지만 살기가 어려운 것은 남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거든요. 그날 전 처음으로 언니가 그렇게 화를 내는걸 봤어요. 그렇게도 말이 없이 조용히 할 일만 하던 언니가 어찌나 화를 내는지 저는 다시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아무튼 그 속에서도 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어요. 하루하루 날이 흐르면서 때로는 우리가 그곳에 추방되어 왔다는 것조차 잊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곳 애들이 워낙 공부를 안 하기도 했겠지만 시험을 봤는데 제가 전교 1등을 한 거예요. 담임 선생님도 축하를 해줬는데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저는 실망하고 말았어요. 우리 담임 선생님도 평양에 살다가 십 년 전쯤에 추방당한 분인데 그분이 어색하게 웃으시며 “그래 공부를 잘해라. 혹시 알겠니 그렇게 공부를 잘하면 순천수의축산대학이나 또 혜산임업대학 쯤 보내 줄지도 말이야.”
사실 선생님은 저한테 힘을 주느라고 한 말이겠지만 저로서는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그 정도 대학 밖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힘이 풀려 그저 언니 눈치나 보면서 적당히 공부하는 척 했을 뿐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언니는 거의 매일 늦게 들어 왔는데 그 날 따라 더 늦어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마중 나갈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어요.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급한 발자국소리와 함께 언니가 들어왔어요. 전 깜짝 놀랐어요. 무엇을 하다가 돌아왔는지 언니 옷은 뜯어져 있었고 머리도 마구 헝클어진 채였어요.
“ 언...언니야 도대체 왜 이렇게 된거야. 무슨 일이 있은거야?”
“묻...묻지말고 빨리...빨리 문을 걸어” 언니는 마치 무슨 강도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와들와들 떨기만 했어요.
“왜 그러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은거야?”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 문을 닫아 걸 생각도 못하고 다시 물었어요.
“글세 묻지말고 문을 닫아걸라고 하잖니” 언니는 버럭 소리질렀어요.
그래서 제가 나가 문에 다가갈 무렵이었어요. 갑자기 발자국소리와 함께 문이 고리채 떨어져 나갔어요. 뜻밖에도 술에 만취한 당비서 아저씨가 들어 왔어요.
“응 여기 있었구나. 너 정말 이럴꺼야?” 당비서 아저씨는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소리쳤어요.
“응 너 은영이도 있구나. 그 ...그런데 말이야 사...사람이 그 만큼 생각해 줬으면 보답할 줄도 알아야지, 왜 그 뭐...뭐더라, 명숙 노친네처럼 막바지 분장에 쫓아 버려야 정신이 들겠어?”
당비서 아저씨 술에 만취한 중에도 금방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뚝 부릅뜨고 언니를 쏘아 봤어요.
“으흑 당비서동지! 제발...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발...으흑...” 언니는 한 쪽에서 무슨 죄를 졌는지 울면서 용서를 빌었어요
“ 뭐 용서! 흥 용서 같은 소리를 하는군...용서라는 건 말이야 용서라는 건 없어. 정 그렇게 용서받고 싶으면 이제라도 가자, 가잔 말이야...”
당비서는 다짜고짜로 언니의 팔을 끌어 당겼어요.
“비...비서동지...윽흑, 오늘만은 ..오늘만은...” 언니는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그렇다고 완강히 뿌리치지는 못했어요.
그럴 때 보면 당비서도 꼭 강계에서 만났던 그 중국 장사꾼같이 보였어요.
“여기가 어딘지 아직 셈판을 모르는구만. 거기 가면 학교도 없어. 동생 공부시키는 건 생각도 못하고 당장 굶어죽어야 돼 알겠어!” 저도 언니가 뭔가 크게 잘 못한 게 있는 것 같아 같이 빌었어요.
“당비서 아저씨 우리 언니가 뭘 잘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한번만...”
당비서 아저씨 갑자기 언니를 놓고 나를 쏘아 봤어요.
“너희들은 모두 ...반동 놈의...반동 놈의 종자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연구실 관리원 자리까지 줬는데 이...이건 도대체 보답할 줄 모르거든 보답할 줄을.”
“비서동지...으흑 비서동지 용서해 주세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언니는 세차게 흐느끼면서도 간절히 용서를 빌었어요.
“좋아 그럼 내 오늘은 은영이도 있고하니 한 번 더 두고 보기로 하지. 하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어.” 비서아저씨가 비틀거리며 나가 버렸어요.
당비서가 나가자 방안에는 언니의 울음소리만 조용히 들리었어요.
“언...언니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무슨 일이 있은거야?”
언니한테 물었어요. 하지만 언니는 대답대신 더욱 서럽게 울기만 했어요. 그날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어요. 언니도 울음소리는 끊겼지만 자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언니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혹시 청소를 하다가 연구실 석고상(김일성 석고상)이라도 다쳐 놓은 게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세상 그렇게도 얌전한 언니가 청소하면서 연구실에서도 제일 중요한 석고상을 다쳐 놓았을 리 없지. 그렇다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어쩌다가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깼더니 언니가 그 때에도 조용히 울고 있었어요. 그런데 울어도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평양에서 추방되어 내려오던 날 밤 그렇게도 쌀쌀하게 결별하던 철준 오빠 사진을 들여다보며 울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걸 보고 저는 더욱 놀랐어요. 언니가 속으로는 철준 오빠를 여전히 잊지 못해 하면서도 그때 그렇게 끊어버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아침이 되었어요. 언니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구실에 나갔어요. 저는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나름대로 평온한 생활이 다시 시작된 거예요. 그 전과 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언니가 거의 말을 잊어버리다시피 해졌다는 거예. 저녁에는 더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가끔씩 무슨 깊은 생각을 하다가 제가 들어가면 깜짝 놀라는 것을 여러 번 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 저는 같은 학급에 다니는 금순이란는 애와 함께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다음호에 계속)

탈북자동지회 회보 2003년 5월[탈북자들] 연재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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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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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해성 ip1 2014-02-14 18:10:34
    오래 전에 썼던 글인데 이후 다시 정리하여 장편소설 "두만강"으로 내 보냈습니다.
    많은 비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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